ㆍ작성자 병암
ㆍ작성일 2016-12-14 (수)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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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헌 신장(申檣)공 수대제학(守大提學)에 대하여

암헌 신장(申檣)공 수대제학(守大提學)에 대하여

 

조선조 초기에는 수문각 대제학(修文閣大提學, 寶文閣, 修文殿 등으로 불리었으나 훗날 弘文館大提學으로 통일), 집현전 대제학(集賢殿大提學),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으로 3명의 대제학(大提學)이 있었다.

 

특히 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1420316일부터 14561029일까지 약 36여 년 동안 있었던 조선국의 국가 연구기관이었으나 세조임금이 집현전을 파하여 홍문관과 예문관을 두었다.

 

1420316일부터 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을 맡았던 변계량(卞季良)1430423일 죽자 1430626일 세종대왕의 명으로 사대문서(事大文書, 명나라에 대한 외교 문서)의 일을 동지총제(同知摠制)였던 신장(申檣)과 제학(提學) 윤회(尹淮)에게 맡긴다.

 

그 후 1433년 음 28일 신장(申檣)52세에 죽자 1433811일 중추원사(中樞院使) 윤회(尹淮)의 건의에 의하여 대제학 정초(鄭招)와 함께 사대문서(事大文書)의 일을 맡았다.

 

따라서 신장(申檣)은 제학(提學)으로써 1430626일부터 1433년 음 28일까지 약 32여월 간 사대문서(事大文書)의 일을 윤회(尹淮)와 함께 맡았다. 그러므로 신장(申檣)은 사대문서(事大文書)의 일을 수행하였으므로 조선왕조실록 1492319일 및 15191218일 기록에 의하여 신장(申檣)을 수집현전대제학(守集賢殿大提學)이라 하여도 된다 생각됩니다.

1680여년 경에 성재 신익상공이 세운 암헌공 묘소 표석에는 가정대부 행공조좌참판겸 집현전제학 신공 휘장 지묘라 기록되어 있으나 가정대부 행공조좌참판겸 집현전수대제학 신공 휘장 지묘嘉靖大夫 行工曹左叅判兼 集賢殿守大提學 申公 諱檣 之墓라 기록되어도 무방할 것이라 생각된다.

 

별첨 참조 : 조선왕조실록 행적 참조

20161214

보고자 신 경 식

세종 7, 2(1420 경자 / 명 영락(永樂) 18) 316(갑신) 집현전의 인원수를 정하고 관원을 임명하다

 

집현전에 새로 영전사(領殿事) 두 사람을 정1으로, 대제학 두 사람을 정2으로, 제학(提學) 두 사람을 종2으로 두되, 이상은 겸직이요, 부제학(副提學)은 정3, 직제학은 종3, 직전(直殿)은 정4, 응교(應敎)는 종4, 교리(校理)는 정5, 부교리는 종5, 수찬(修撰)은 정6, 부수찬은 종6, 박사(博士)는 정7, 저작(著作)은 정8, 정자(正字)는 정9으로, 이상은 녹관(祿官)으로 하며, 모두 경연관(經筵官)을 겸임하였다. 부제학 이하의 낭청(郞廳)10명을 두되, 품에 따라서 임명하고, 차례대로 가리어 전임(轉任)하며, 각품에서 두 사람을 초과하지 아니하였다. 5, 6품은 부검토(副檢討)를 겸임하였다. 각품의 차례는 다 본 품반(品班)의 머리로 하였다. 제학과 부제학의 서열은 사간(司諫)의 위로 하였다. 박은·이원으로 영전사(領殿事), 유관·변계량을 대제학, 탁신(卓愼이수(李隨)를 제학에, 신장(申檣)·김자(金赭)직제학, 어변갑(魚變甲김상직(金尙直)을 응교(應敎), 설순(偰循유상지(兪尙智)를 교리(校理), 유효통(兪孝通안지(安止)를 수찬(修撰), 김돈(金墩최만리(崔萬理)를 박사(博士)에 임명하였다. 처음에 고려의 제도에 의하여 수문전(修文殿집현전·보문각(寶文閣)의 대제학과 제학은 2품 이상으로 임명하고, 직제학·직전(直殿직각(直閣)3, 4품으로 임명하였으나, 그러나, 관청도 없고 직무도 없이 오직 문신으로 관직을 주었을 뿐이었는데, 이제에 이르러 모두 폐지하고, 다만 집현전만 남겨 두어 관사(官司)를 궁중에 두고, 문관 가운데서 재주와 행실이 있고, 나이 젊은 사람을 택하여 이에 채워서, 오로지 경전과 역사의 강론을 일삼고 임금의 자문에 대비하였다.

 


世宗 7, 2(1420 庚子 / 명 영락(永樂) 18) 316(甲申) 집현전의 인원수를 정하고 관원을 임명하다

 

甲申/新置集賢殿領殿事二正一品, 大提學二正二品, 提學二從二品, 以上兼官副提學正三品, 直提學從三品, 直殿正四品, 應敎從四品, 校理正五品, 副校理從五品, 修撰正六品, 副修撰從六品, 博士正七品, 著作正八品, 正字正九品, 以上祿官, 皆兼經筵官副提學以下郞廳置十員, 隨品差下, 以次選轉, 各品不過二員, 五六品兼副檢討又於經筵, 加設司經, 七品以下兼之, 各品皆序本品班頭, 副提學班在司諫之上以朴訔李原領殿事, 柳寬卞季良爲大提學, 卓愼李隨提學, 申檣金赭直提學, 魚變甲金尙直應敎, 偰循兪尙智校理, 兪孝通安止修撰, 金墩崔萬理博士初因前朝之制, 修文殿集賢殿寶文閣大提學提學以二品以上爲之; 直提學直殿直閣以三四品爲之, 然無官署職任, 唯以文臣加官而已至是悉罷之, 只留集賢殿, 置司于宮中, 擇文臣有才行年少者充之, 專事講論經史, 以備顧問

 

 

세종 020 05/1423/06/23 (임신) 011 / 임금이 문사 변계량의 후임 주문자에 대해 전지하다

 

전지하기를,

옛날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 하윤(河崙)과 길창군(吉昌君) 권근(權近)이 문사(文詞)를 맡았을 때에, 대제학(大提學) 변계량(卞季良)이 그 문하에 내왕하면서 익히었다. 이제 집현전 부제학(副提學) 신장(申檣)이 또한 변계량(卞季良)의 문하에 내왕하면서 익히고 있다. 처음에 임금이 계량(季良)에게 묻기를, ‘()을 이을 주문자(主文者)가 누구인가.’ 하니, 계량(季良)신장(申檣)이라고 대답하였었다. 그 때에 윤회(尹淮)의 문예(文藝)가 장()보다 우월하였으나, 본래 계량(季良)과 의견의 틀림이 많았었는데, 이에 이르러 더욱 좋지 못하였다.”

하였다.

 

세종실록 48, 세종 12423일 계사 1번째기사 1430년 명 선덕(宣德) 5년 판우군부사 변계량의 졸기

 

판우군부사 변계량이 죽었다. 계량(季良)의 자는 거경(巨卿)이요, 호는 춘정(春亭)이니, 밀양부(密陽府) 사람 옥란(玉蘭)의 아들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4살에 고시대귀(古詩對句)를 외고 6살에 비로소 글귀를 지었다. 14(1382)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고 15살에 생원 시험에 합격하였으며, 17(1385)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교 주부(典校主簿)에 보직(補職)되어 여러 번 옮겨 사헌 시사(司憲侍史)가 되고, 성균 악정(成均樂正)을 지나 직 예문관(直藝文館사재 소감 겸 예문 응교(司宰少監兼藝文應敎예문 직제학(藝文直提學)을 지냈다. 정해년(1407) 중시(重試)에서 을과(乙科)의 제1등으로 뽑혀서 특별히 예조 우참의에 임명되고, 기축년(1409)에 예문관 제학에 승진하였다. 을미년(1415)에 크게 가물어서 임금이 심히 근심하니, 계량(季良)이 아뢰기를,


본국에서 하늘에 제사하는 것은 비록 예()가 아니라고 말할 것이나, 일이 이미 박절하오니 원단(圓壇)에 기도하옵소서.”


하니, 곧 계량(季良)에게 글을 지어 제사지내라고 명하였다. 정유년(1417)예문 대제학에 임명되고 이듬해(1418)에 예조 판서로 옮겼다가 이내 의정부 참찬으로 옮겼다. 그 다음 해(1419)에 왜놈들이 우리 나라 남쪽 변경을 침략하여 죽이고 약탈함이 많았는데, 태종 대왕이 계량(季良)의 말을 취하여 정벌(征伐)하기로 하였다. 병오년(1428)에 판우군 도총제 부사가 되었다가 이에 이르러 죽으니, 나이 62(1430)이었다. 부고를 듣자 사흘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유사에게 명하여 치제(致祭)하고 부의와 관()을 하사하며, 동궁도 부의로 쌀과 콩을 아울러 30석을 내리었다. 시호를 문숙(文肅)이라 하니, 배우기에 부지런하고 묻기를 좋아함이 문()이요, 마음을 굳게 잡고 일을 결단함이 숙()이다. 계량(季良)이 문형(文衡)을 거의 20년 동안이나 맡아서 대국을 섬기고 이웃 나라를 교제하는 사명(詞命)이 그 손에서 많이 나왔고, 시험을 주장하여 선비를 뽑는 데 한결같이 지극히 공정하게 하여, 전조(前朝)의 함부로 부정(不正)하게 하던 습관을 다 고쳤으며, 일을 의논하고 의문을 해결하는 데에 이따금 다른 사람의 상상 밖에 나오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문()을 맡은 대신으로서 살기를 탐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귀신을 섬기고 부처를 받들며, 하늘에 절하는 일까지 하여 하지 않는 바가 없으니, 식자들이 조롱하였다. 처음에 철원 부사 권총(權總)의 딸에게 장가들었다가 버리고, 또 오씨(吳氏)에게 장가들었다가 죽고, 또 이촌(李村)의 딸에게 장가들어 몇 달 만에 버리고, 또 도총제 박언충(朴彦忠)의 딸에게 장가드니, 아내가 있으면서 다른 아내에게 장가들었다는 일로서 유사들의 탄핵하는 바가 되었다. 마침내 아들이 없고, 비첩(婢妾)의 아들이 있으니, 이름이 영수(英壽)이다.

 

세종 048 12/1430/06/26 (을미) 002 / 신장에게 사대 문서를 전장하여 재단할 것을 명하다

 

동지총제 신장(申檣)에게 명하기를,

지금부터 무릇 사대 문서(事大文書)는 경이 전장(專掌)하여 재단(裁斷)하라.”

하니, ()이 굳이 사양하되 윤허하지 않으므로, ()이 제학(提學) 윤회(尹淮)와 더불어 함께 맡기를 청하니, 이에 ()를 불러 명하기를,

경이 신장(申檣)과 더불어 사대 문서를 함께 맡으라.”

하였다.

 

세종실록 61, 세종 15년 윤811일 신유 3번째기사 1433년 명 선덕(宣德) 8년 중추원사 윤회가 사대 문서 맡아 보는 일을 정초와 함께 맡을 것을 아뢰다

 

중추원사(中樞院使) 윤회(尹淮)가 아뢰기를,

 

"사대 문서(事大文書)를 맡아 보는 일을 신과 신장(申檣)이 함께 성상의 어명을 받자왔는데, 신장申檣)이 이미 죽어서 신이 혼자 맡았사오나, 그러나 일이 중대하여서 불가불 다른 사람과 함께 하여야 하겠사오니, 대제학 정초(鄭招)와 함께 맡기를 원하옵니다."

 

하니, ()를 불러서 회()와 함께 사대 문서를 맡게 하였다.

 

세종실록 71, 세종 18312일 무인 2번째기사 1436년 명 정통(正統) 1년 예문 대제학 윤회의 졸기

 

예문 대제학(藝文大提學) 윤회(尹淮)가 졸()하였다. ()의 자는 청경(淸卿)이며, 본관은 무송(茂松)이니, 윤소종(尹紹宗)의 아들이다. 나이 겨우 10세에 통감강목(通鑑綱目)을 능히 외웠고, 총명하고 민첩함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다. 신사년(1401)에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번 옮겨 좌정언(左正言), 이조·병조의 좌랑(佐郞)과 이조·예조의 정랑(正郞)과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를 거쳐 변정 도감(辨正都監)이 되어 송사를 판결함이 공명하고 진실하였으며, 정유년(1417)에는 대언(代言)에 임명되었다. 태종(太宗)께서 일찍이 회()에게 이르기를,

 

"경은 학문이 고금을 통달했으므로 세상에 드문 재주이고, 용렬한 무리의 비교가 아니니, 경은 힘쓰라."

 

하였다. 조금 후에 회()를 병조 참의로 삼아 항상 가까이 모시게 하고, 매양 순정(純正)한 유학자라 일컬었다. 임인년(1422)에 어떤 사건으로써 파면되었다가 조금 후에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으로 임명되고, 계묘년(1423)에 동지우군 총제에 승진되어 예문 제학(藝文提學)을 지내었다. 임자년(1432)에 어머니 상()을 당하였으나 기복(起復)시키니, 전문을 올려 굳이 사양했으나 윤허되지 아니하고, 얼마 후에 대제학(大提學)으로 임명되었다. 천성이 술을 즐기니 두 임금께서 여러 번 꾸짖어 금하게 하였으나, 오히려 능히 그치지 못하였다. 갑인년(1434)에 여러 유신(儒臣)들을 집현전에 모아서 통감훈의(通鑑訓義)를 찬집(纂集)하는데, ()에게 명하여 그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는 풍질(風疾)을 앓았는데 병을 참고 종사(從事)하더니, 두 번 해가 바뀌어 겨우 마치자 병이 날로 위중하였다. 임금이 의원을 보내어 진찰하게 하고, 또 내수소(內需所)의 좋은 약을 내려 주어 조섭(調攝) 보호하게 하다 돌아가니 나이 57세이다. 조회와 저자[市場]를 정지하고, 조문(弔問)하고 부의를 내려 사제(賜祭)했으며, 동궁(東宮)께서도 또한 치제(致祭)하였다. 문도(文度)란 시호(諡號)를 내리니, 학문에 부지런하고 묻기를 좋아함을 문()이라 하고, 마음을 능히 의리로써 제어함을 도()라 한다. 두 아들이 있으니 윤경연(尹景淵)과 윤경원(尹景源)이다.

 

성종실록 263, 성종 23319일 기축 3번째기사 1492년 명 홍치(弘治) 5년 문형을 담당하는 대제학에 적합한 인물을 의논케 하고 홍귀달에게 제수하다

 

윤필상(尹弼商)이 의논하기를,

노공필(盧公弼)과 이봉(李封)의 재능은 신()이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대성(臺省)과 재상(宰相) 중에 그 사람들을 버려두고 누구이겠습니까? 홍귀달(洪貴達)·유순(柳洵)은 직질(職秩)은 비록 낮지만 그 재능(才能)이 감당할 만합니다.”

하고, 이극배(李克培)는 의논하기를,

노공필의 문학(文學)은 여론으로 모두 추대합니다. 그러나 신은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청컨대 우선 할 수 있음을 시험하게 하소서.”

하고, 이조(吏曹)에서는 아뢰기를,

노공필이 대제학에는 직위(職位)와 차서(次序)가 다 알맞으며 재능도 취할 만합니다. 그러나 홍귀달(洪貴達)·유순(柳洵)도 사람들이 모두 문형(文衡)을 맡길 만하다고 하니, 두 사람 가운데 선택하여 제수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니, 전교(傳敎)하기를,

문신(文臣)들과 널리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임원준(任元濬)이 의논하기를,

옛날에 사람을 뽑는데 있어서는 한 사람에게 다 갖추어지기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문예(文藝) 한 가지 일로 말하더라도 학문(學問)은 해박(該博)하면서도 제술(製述)에 능하지 못한 자도 있고, 학문에는 정심(精深)하지 못하면서도 문사(文詞)에 능한 자도 있으므로, 그 재주가 각각 다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구비(俱備)하기는 사실 어렵습니다. 문형(文衡)을 담당하는 자가 굳이 사부(詞賦)에 능할 필요가 없는 것이며, 국가(國家)의 문한(文翰)도 어찌 하나하나 직접 지어야 하겠습니까? 만약 고금(古今)에 통달(通達)하고 사체(事體)에 밝고 식감(識鑑)과 권도(權度)가 있는 자를 얻어서 그 책임을 맡긴다면 여러 저술(著述)을 선별해서 증감(增減)하고 윤색(潤色)하여 사명(詞命)이 올바르게 될 것입니다. 지금 직위와 품계의 높고 낮음을 가지고 임명한다면 아마도 일에 막히게 될 것입니다. 세종조(世宗朝)에 신장(申檣)·안지(安止)는 종2(從二品)이었고, 세조조(世祖朝)에 이계전(李季甸최항(崔恒)은 정1(正一品)으로 담당하였었는데, 이는 그 임무를 감당할 수 있는 점을 취한 것이지 어찌 자급(資級)의 높고 낮음에 구애한 것이겠습니까? 지금 이조(吏曹)에서는 대전(大典)에 문형을 담당하는 자가 대제학(大提學)·지관사(知館事)의 직임(職任)을 띠도록 기록되어 있으므로, 반드시 정2품으로 의망(擬望)하여 차정(差定)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나라의 제도에 관직을 제수(除授)함에 있어 행직(行職)과 수직(守職)의 관례가 있으니, 문형을 담당하는 자는 실직(實職)이므로, 비록 종2품이라고 하더라도 대제학·지관사는 수직(守職)으로 제수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더구나 사명(詞命)은 나라의 큰 일이므로 만약 그 임무를 담당할 만한 자가 있으면 비록 백의(白衣)의 서생(書生)이라도 등용할 수 있는 것인데, 2품 중에서 할 만한 자에게 자급을 올려서 임명하는 것이 일에 무슨 장애가 되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서는 박학(博學) 다문(多聞)하고 대체(大體)를 아는 자는 허종(許悰)이 바로 그러한 사람이고, 그 다음은 홍귀달(洪貴達유순(柳洵성현(成俔권건(權健신종호(申從濩)가 모두 대수(大手)이므로, 문병(文柄)을 맡길 만합니다.”

하고, 유자광(柳子光성건(成健이칙(李則김승경(金升卿채수(蔡壽성현(成俔이육(李陸) ·김극유(金克忸신말주(申末舟)·안호(安瑚김심(金諶)은 의논하기를,

현재 문묵(文墨)으로 이름난 자가 어찌 그만한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문형(文衡)의 책임은 몸에 큰 문제가 있지 아니하면 일찍이 경솔하게 개차(改差)한 적이 없었습니다. 조종조(祖宗朝)에 권근(權近윤회(尹淮변계량(卞季良최항(崔恒)이 모두 문형을 담당했었는데, ()을 만났어도 체직(遞職)시키지 아니하였습니다. 당시에 어찌 대신할 만한 자가 없었겠습니까만, 대체로 그 책임이 지극히 중하므로 경솔하게 자리가 비는 대로 따라서 바꿀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이 있으니, 우선, 그 임무를 대신하게 했다가 어세겸(魚世謙)이 복()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고, 박안성(朴安性김자정(金自貞권건(權健신종호(申從濩)는 의논하기를,

문형을 맡는 것은 중임(重任)이므로, 만약 적당한 사람이 없으면 차라리 우선 비워두는 것이지 경솔하게 제수할 수는 없습니다. 어세겸은 지금 비록 상중(喪中)이기는 합니다만, 그 몸에 유고(有故)한 것은 아닌데, 만약 사대(事大교린(交隣사명(辭命) 등의 중대한 일이 있으면 사람을 보내어 물어서 하더라도 진실로 사체(事體)에는 해로움이 없을 것이니, 아직까지는 자리 메꿈의 차정(差定)은 하지 마시고 복()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게 하소서.”

하고, 박숭질(朴崇質임사홍(任士洪)은 의논하기를,

문형(文衡)을 담당하는 직임(職任)은 전조(前朝)에 문헌(文獻)이 번성할 때부터 아조(我朝)에 이르기까지 모두 중대하게 여겼으므로, 물망(物望)이 집중되는 사람이 아니면 불가(不可)합니다. 그리고 비록 가능한 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지위가 낮으면 덕망(德望)이 중하지 않고 나이 젊으면 사람이 가볍게 여기니, 덕망이 두텁고 노련한 이로서 사문(斯文)을 진압(鎭壓)할 수 있는 이만 못합니다. 굳이 관직(官職)의 차례로 그 직임(職任)을 의망(儀擬)하여 의논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지금 삼공(三公) 중에도 경술(經術)이 있고 박학(博學)한 이가 있는데, 영성 부원군(寧城府院君) 최항(崔恒)의 예에 의거하여 그 직임을 맡게 해도 될 것입니다. 만일 알맞은 사람이 없으면 옛날에도 그 직임을 중하게 여겨 그 자리를 비워 두었으니, 아직 어세겸(魚世謙)이 상()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만일 반드시 그 자리를 채워야 한다면, 홍귀달(洪貴達유순(柳洵권건(權健신종호(申從濩)·성현(成俔)이 모두 그 직임을 감당할 만한 자입니다.”

하고, 윤민(尹慜)은 의논하기를,

문형을 맡는 직임은 그 재예(才藝)만 취할 뿐이 아니고 반드시 위망(位望)과 덕행(德行)이 모두 훌륭한 자라야 그 직임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의정(右議政) 노사신(盧思愼)은 덕망이 높고 지위도 높으며, 여러 글을 널리 통달하였고 문장(文章)도 법도가 있어서 당시에 문형을 담당할 자로서는 그 이상 갈 사람이 없습니다. 더구나 근년(近年)정인지(鄭麟趾신숙주(申叔舟최항(崔恒)이 모두 삼공(三公)으로서 대제학(大提學)을 겸한 것은 분명한 고례(古例)가 있습니다.”

하고, 이숙함(李叔咸)은 의논하기를,

옛부터 인재(人才)는 이대(異代)에서 빌려오지는 아니하였습니다. 현재 노공필·이봉·홍귀달·신종호·유순·성현은 모두 문형을 담당할 만합니다. 그러나 종장(宗匠)이 될 만한 대수(大手)로서 일찍부터 중망(重望)이 있어 많은 사람에게 추앙을 받던 이만은 못합니다. 세조조(世祖朝)에 최항(崔恒)이 삼공으로서 문형을 오래도록 담당하였었는데, 지금 우의정인 노사신은 종장이 될 만한 대수로서 최항만 못하지 않으니, 조종조(祖宗朝)의 고사(故事)에 의하더라도 불가(不可)할 것이 없습니다.”

하고, 김여석(金礪石이예견(李禮堅이거(李琚유경(劉璟민휘(閔暉)는 의논하기를,

문형은 중임(重任)이므로 가볍게 제수할 수가 없습니다. 어세겸이 비록 복중(服中)에 있다 하더라도 다른 사고(事故)는 없으니, 만일 사명(辭命) 같은 중대한 일이 있으면 관원(官員)을 보내어 물어 올 수도 있는 것이니, 아직 빈자리를 메꾸지 말고 있다가 복()을 마친 다음에 다시 제수한들 무슨 잘못되는 바가 있겠습니까? 만약 문형을 담당할 자리를 오래 비워 둘 수 없는 형편이라면 홍귀달이 좋을 것입니다.”

하고, 김응기(金應箕권오복(權五福이의손(李懿孫이관(李寬이손(李蓀홍석보(洪碩輔김경광(金景光황사효(黃事孝허황(許葟최진(崔璡김율(金硉성세명(成世明정석견(鄭錫堅기찬(奇禶신경(申經이극규(李克圭최관(崔灌이복선(李復善유양춘(柳楊春홍형(洪泂유효산(柳孝山조말손(曹末孫김윤신(金閏身이의무(李宜茂)·유호인(愈好仁송질(宋軼민사건(閔師騫변상(邊祥이수언(李粹彦홍식(洪湜권경유(權景裕남궁찬(南宮璨서팽소(徐彭召이계복(李繼福이적(李績민이(閔頤민상안(閔祥安홍한(洪翰이수무(李秀茂이수공(李守恭김원(金瑗민수복(閔壽福조구(趙球이오(李鰲정수(鄭洙김일손(金馹孫)은 의논하기를,

홍귀달은 문형(文衡)을 담당할 만합니다.”

하고, 김봉(金崶최인(崔潾이세영(李世英이효독(李孝篤안윤덕(安潤德)은 의논하기를,

어세겸(魚世謙)이 문형을 담당한 데 대해서 여론이 매우 만족하게 여기는데, 어찌 가볍게 체임시킬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3년상(三年喪)의 제도는 기한이 있는 것이니, 만약 화국(華國)해야 할 큰 일이 있으면 사신(詞臣)을 시켜 집에 가서 묻게 해도 될 것입니다.”

하고, 정탁(鄭鐸조형(趙珩이계맹(李繼孟)은 의논하기를,

문형을 담당하게 하는 것은 신중하게 선발해야 하므로, 가볍게 고칠 수가 없습니다. 아직 그 자리를 비워 두었다가 어세겸이 3년상을 마칠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소서. 만약 부득이(不得已)하여 고친다면 우의정(右議政) 노사신(盧思愼)이 여러 사람의 기대에 부응(副應)합니다.”

하고, 이세전(李世銓양희지(楊熙止최숙경(崔淑卿최부(崔溥김물(金勿)은 의논하기를,

선왕조(先王朝) 때에 최항(崔恒)이 의정(議政)으로 대제학(大提學)을 겸하였었습니다. 지금 우의정 노사신이 합당합니다.”

하고, 허집(許輯이자건(李自健이달선(李達善권유(權瑠남세주(南世周강혼(姜渾김감(金勘이과(李顆)는 의논하기를,

신종호(申從濩)가 문형을 맡을 만합니다.”

하였는데, 전교하기를,

홍귀달에게 직위를 승진시켜 문형을 담당하는 직임을 제수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대제학(大提學)은 문형(文衡)을 담당하는 자이다. 노공필(盧公弼)은 문사(文詞)에 부족(不足)하였으나 직위가 상당하다고 하여 제수하니, 사람들이 모두 마음에 만족하게 여기지 않았었다. 이때에 와서 체임(遞任)시키고 홍귀달(洪貴達)을 제수하였는데, 홍귀달은 젊어서부터 저술(著述)에 마음을 두어 시문(詩文)이 뛰어났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잘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탐욕스럽고 청렴하지 못하였으니, 재주는 넉넉하나 덕()이 모자라는 자이다.” 하였다.

 


成宗 263, 23(1492 壬子 / 명 홍치(弘治) 5) 319(己丑) 문형을 담당하는 대제학에 적합한 인물을 의논케 하고 홍귀달에게 제수하다

 

尹弼商議: “盧公弼李封之才, 臣未詳知, 然省宰之中, 捨此伊誰? 洪貴達柳洵, 職秩雖卑, 其才可堪李克培議: “公弼之文學, 物論皆推之, 然臣未知其詳, 請姑試其可吏曹啓曰: “公弼於大提學, 職次相當, 才亦可取, 然洪貴達柳洵, 人皆言可, 典文衡二人之中, 擇而授之可也傳曰: “其廣議于文臣以啓任元濬議: “古之取人, 無求備于一夫, 今以文藝一事言之, 學問該博而有短於製述者, 學問雖未精深而有工於文詞者, 其才各異, 一人俱備實難主文者不須詞賦之工, 國家文翰, 亦豈一一親撰? 若得通古今達事體有識鑑權度者, 授其任則可, 以取捨諸作, 增減潤色, 詞命得宜矣今以職秩高下爲之, 則恐泥於事世宗朝, 申檣安止以從二品, 世祖朝李季甸崔恒以正一品爲之, 此取其能堪其任耳, 何拘於資級之高下? 今吏曹以大典載主文者, 職帶大提學知館事, 故必以正二品擬差然國制除官有行守之例, 主文者實職, 雖從二品大提學知館事, 守而授之爲便況詞命國之大事, 若有能當其任者, 則雖白衣登用亦可從二品內可者, 陞資以任, 何礙於事? 臣意謂, 博學多聞識大體者, (許悰)許琮其人也其次則洪貴達柳洵成俔權健申從濩, 皆大手, 可付文柄者柳子光成健李則金升卿蔡壽成俔李陸金克忸申末舟安瑚金諶議: “當今以文墨名者, 豈無其人? 然文衡之任, 非身有大故, 未嘗輕改, 祖宗朝權近尹淮卞季良崔恒, 皆以主文遭喪而不遞, 當時豈無可代者? 蓋其任至重, 不可輕易隨闕改授況弘文館提學在焉, 姑使代其任, 以待世謙服闋可也朴安性金自貞權健申從濩議: “主文重任, 如無人則寧姑闕焉, 不可輕授世謙今雖在服, 非其身有故, 若有事大交隣辭命重事, 遣人就問, 無害事體, 姑勿塡差, 以待服闋朴崇質任士洪議: “典文衡之任, 自前朝文獻盛時, 至于我朝, 咸以爲重, 非物議所歸則不可且雖有可者, 位卑則望不重, 年少則人輕之, 不如宿德老手, 鎭壓斯文, 何必以官職次第, 擬議其任? 今三公中亦有經術博學者, 依寧城府院君崔恒例, 俾典其任可也如無其人, 則古者亦有重其職而虛其位, 姑俟魚世謙終制而爲之亦可如必充其任, 則洪貴達柳洵權健申從濩成俔皆堪其任者也尹慜議: “文衡之任, 非徒取其才藝, 必位望德行俱優者, 能稱其任右議政盧思愼, 德尊位高, 博極群書, 文章典雅, 當時典文衡者, 無出其右況近年鄭麟趾申叔舟崔恒, 皆以三公, 仍兼大提學, 明有古例李叔咸議: “自古才不借於異代, 當今如盧公弼李封洪貴達權健申從濩柳洵成俔, 皆可典文衡, 然不若宗匠大手, 宿有重望, 爲物議所推服世祖朝崔恒, 以三公久典文衡, 今右議政盧思愼, 宗匠大手, 不讓崔恒, 依祖宗朝故事, 無所不可金礪石李禮堅楊沔李琚劉璟閔暉議: “文衡重任, 不可輕授魚世謙雖在服中, 無他事故, 如有辭命重事, 猶可遣官就問, 姑勿塡闕, 服闋還授, 有何所妨? 若曰主文不可久闕, 則洪貴達其可也金應箕權五福李懿孫李寬李蓀洪碩輔金景光黃事孝許篁崔璡金硉成世明鄭錫堅奇禶申經李克圭崔灌李復善柳楊春洪泂柳孝山曹末孫金閏身李宜茂(愈好仁)兪好仁〕、宋軼閔師騫邊祥李粹彦洪湜權景裕南宮璨徐彭召李繼福李績閔頤閔祥安洪瀚李秀茂李守恭金瑗閔壽福趙球李鰲鄭洙金馹孫議: “洪貴達可典文衡金崶崔潾李世英李孝篤安潤德議: “世謙主文, 甚愜物論, 豈容輕遞! 況三年之制, 自有期限, 若有華國大事, 則使詞臣就第質問可也鄭鐸趙珩李繼孟議: “主文重選, 不可輕改, 姑闕其位, 以待世謙喪畢, 若不得已而改, 則右議政盧思愼可副衆望李世銓楊熙止崔淑卿崔溥金勿議: “在先王朝, 崔恒以議政兼大提學, 今右議政盧思愼可當許輯李自健李達善權瑠南世周姜渾金勘李顆議: “申從濩可典文衡傳曰: “洪貴達可陞職授主文之任


史臣曰: “大提學主文衡者也公弼短於文詞, 以職秩相當授之, 人皆不滿於意, 至是遞授貴達貴達自少留心著述, 詩文豪健, 議者皆以爲可, 然貪黷無廉介, 才有餘而德不優者也

 

 

중종실록 37, 중종 141218일 무인 2번째기사 1519년 명 정덕(正德) 14년 남곤·이유청이 두번이나 사직하나 윤허하지 않다

 

남곤·이유청이 두 번이나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남곤 등이 이어서 아뢰기를,

대제학(大提學)을 감당할 만한 사람으로 가선(嘉善) 이상에 있는 자가 두세 사람인데 죄받은 무리에 들어 있고최숙생(崔淑生김안국(金安國유운(柳雲) 등을 가리킨다.그 밖에는 마땅한 사람을 모릅니다. 통정(通政) 줄에서는 오직 이행(李荇)이 인물이 매우 마땅하나 품계가 낮습니다. 신이 듣건대, 세종조(世宗朝)에서 신장(申檣신석조(辛碩祖) 등이 다 가선·가정(嘉靖)으로서 수 대제학(守大提學)이 되었다 합니다. 이런 전계가 있으나, 이행의 지급(資級)은 가선에도 못미치므로 아뢰기 어렵습니다. 그 밖에는 마땅한 사람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아뢰기를,

대제학의 직임은 오래 비워 둘 수 없으며, 이행은 전에 가선이 되었다가 도로 개정되었으니, 이제 이행에게 가선을 제수하여 수 대제학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中宗 37, 14(1519 己卯 / 명 정덕(正德) 14) 1218(戊寅) 남곤·이유청이 두번이나 사직하나 윤허하지 않다


南袞李惟淸再辭, 不允袞等仍啓曰: “大提學可當人, 在嘉善以上者數三人, 入於被罪之類,指崔淑生金安國柳雲等。】其外則不知其人也通政之列, 惟李荇, 人物甚當, 但秩卑矣臣聞世宗朝, 申檣辛碩祖等, 皆以嘉善嘉靖, 守大提學, 有此前例但荇之資級, 猶未及嘉善, 啓達爲難, 其他則未得其人也上曰: “大提學之任, 不可久曠李荇曾爲嘉善而還改, 今可以荇授嘉善, 爲守大提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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