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작성자 신원호
ㆍ작성일 2016-10-24 (월)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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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중심이요 활의 거벽(巨擘) 이요정 선용개 선조님

선비의 중심이요 활의 거벽(巨擘) 이요정 선용개 선조님

강직한 선비 이요정 신용개. 그가 스물 하나에 과거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자 사람들은 그를 거벽이라 했다. 말 타고 활 쏘는 데 언제나 으뜸이었던 그였다. 들판을 달리고 산을 누비고 다닐 때 보면 그는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을 둣이 거침이 없었다. 또래 동료들은 물론 그를 아는 어떤 사람들도 말타기와 활쏘기에 있어서는 그를 따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엔 학문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해 과거에도 급제했던 것이다. 거벽이란 말은 그래서 걸 맞는 표현이 되었다.

 

관리들은 그를 보고 앞으로 장상이 될 그릇이라 했다. 그 말을 입증이라도 해 주듯이 그는 과거에 급제한지 4년 만에 문과에 급제하고홍문관에 들어갔다. 이때 임금인 성종은 그런 신용개에게 자기의 옷을 벗어서 입혀 주었다.

 

명궁 신용개는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조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막힌 언로를 트이게 하고 임금이 게으름을 피우면 가차없이 일러주었다. 그는 천성이 활달하고 호방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위엄이 대단해서 언뜻 대하기가 어려웠지만 한번 대하면 온화하였다. 문장은 속된 기운이 없어서 좋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런 신용개의 말 한마디는 그대로 국사에 반영되곤 했다.

 

활에 있어서는 그의 모습이 따로 있는 듯 의연하고 기품있는 경지 에 도달해 있었다. 그는 관리가 된 후에도 틈만 나면 활터로 나가 시위를 당겼다. 연륜이 쌓이고 경륜이 높아지면서 명궁의 솜씨도 더욱 세련되어 갔다. 문무겸전의 고매한 뜻과 기백, 그것이 바로 그의 모습이고 체취였다.

 

조선의 선비로서 활을 쏜다는 것은 인격 수양의 한 단계이고 정진 하는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활쏘기는 그래서 예()의 경지로 보기 도 했다. 사예(射藝)니 사기(射技)니 했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 이었다.

 

그 전통은 주례(周禮)의 기록과 무관하지 않다.주례에는 사 ()가 다섯 가지 즉 오사(五射)가 있다 했다. 첫째는 백시(白矢)로 과녁을 쏠 때 지나가는 화살촉이 희게 보이는 것이었다. 둘째는 삼련 (參連)으로 먼저 한 개의 화살을 쏜 다음에 세 개의 화살을 잇달아 쏘는 것이었다. 다음이 섬주(刺注인데 이는 끝의 깃머리는 높고 앞의 화살촉은 낮게 반짝이면서 날아가는 것이었다. 그 다음은 양척(襄尺)이었다. 즉 신하와 임금이 함께 쏘게 되면 신하가 임금에게 한 자 쯤 거리를 양보하고 똑같이 서지 않는 것이었다. 다섯째는 정의(井儀)인데 이는 네 개의 화살을 모두 맞히어 그 모양이 우물 정자 모양으로 단정한 것을 이르는 것이었다.

 

오사가 갖추어질 때 그를 예()로 보기도 했던 것이다. 그것이 조 선의 선비에게 전적으로 적용된 것은 아니었지만 활쏘기의 규범에 있어서는 작든 크든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따라서 무관이 아닌 사람으로서 활을 잘 쓴다는 것은 그대로 어떤 인물됨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릇의 모양을 가늠해 보게 하는 쉬운 척 도가 되기도 했다.

 

신용개는 일찍이 궁마로 거벽이라는 소리를 듣더니 조정에 듈어와 서는 뭇 선비들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그는 신진 관료들이 따르는 정광필과 친교가 돈독했다. 사람들이 정광필에게 친구가 있다면 누구인가 하고 물으면 정광필은 친구는 없고 오직 신용개가 있다고 대답하곤 했다.

 

그 다음날 신용개에게 또 그렇게 묻자 그는 답하기를 내 친구는 오직 한 사람 정광필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신용개는 당시 뜻있는 선비들이 옳은 생각을 전달하는 창구 역할을 함으로써 사악한 무리가 발호하지 못하도록 하는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활을 잘 쏘아 여러 문인들의 기록에 남아 있는 그의 명성은 꿋굿하고 호협한 그의 평소 기질과 잘 맞는 것이었다. 구는 중종반정 이후에 대사헌, 판서를 두루 거친 후 우의정좌의정에 올랐다가 현직에 있을 때 병사했다.

 

그의 생애에 있어 활은 항상 기개를 보여주는 애용물이었다. 선비 들은 그의 기개를 기록으로 남겨 놓을 때 그가 활을 잘 쏘았다는 사 실을 빠뜨리지 않았다.

 

모든 선비의 중심이요, 활의 거벽이라는 말은 명궁의 생애를 압축 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 답 변 ====================

   좋은 글을 전하여주심에 감사를 드림니다.

이요정공께서는 북백공의 아드님으로써 건강만 허락되셨다며는 영의정에 오르시고도 남을 분이셨는데 좌의정 재직중에 병환으로 서거하심에 안타까음이 너무나도 큰 것입니다.



북백공꼐서 이시애의란중에 함길도관찰사로 출병하시여 애석히 반란군에 의하여 전사하시고 그 시신도 찾지못한 후손들의 원한이 가득한 것입니다.



북백공께서는 우리신문의 멸문지화의 중차대한 와중에 출전하시여 전사하심에 우리고령신문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시애가 보한재등과 모의하여 란을 일으켰다고 무고하였기에 보한재께서 감옥에 갇혀서 내일을 가눔치 못할 때에 출전 전사하신 것입니다.



다행이 이시애가 이실직고하여 사실이 아닌 모함이였음을 실토하였기에 보한재께서 풀려나시여 불세출의 국가운영과 저명한 역사적 사건들을 처결하고 고귀한저서들을 남겨서 후세 나라운영의 기틀을 마련하여 실천하셨던 것입니다.



북백공의 자식으로써 마음속 깊은 한을 품은 공께서 활쏘기와 말타기를 게을리하지 않으셔서 무인들도 두려워하였던 것인데 문인으로써도 걸출하시여 21세의 어린나이로 대과에 급제하여 조정에서 큰 역활을 하셨던것입니다.



이 깊어가는가을에 되짚어보려니 공꼐서 손님을 초대하였으니 소흘히 준비를하면 않되겠기에 술상과 음식준비를 차려놓으니 손님은 오지를 않고 평소에 정성들여서 키우던 국화들과 깊어가는가을을 음미하였다는사례가 문헌으로 전해옵니다.



사람만이 아닌 식물인 국화와도 소통을 하셨던 이요정 공 신용개 선조님의 인품을 짐작케합니다.



2016년 10월24일



 26世 영성군파

향암  신 원호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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