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작성자 신원호
ㆍ작성일 2016-10-08 (토)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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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역사에 이름을 올린 고령신문의 여인들.

역사(歷史)에 이름을 올린 고령신문 (高靈申門)의 女人들.


어느 문중이건 간에 우리는 남자들의 이야기와 사건들을 주로 거론들을 하거나 중심 적인 면으로 거론들을 하는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면에는 역사를 움직인 인물들이 여자인 경우가 자주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런 연유에서 우리 고령신문에서도 역사적인 사건에 중심역활들을 하였거나 중요 사건및 실화들로 이름을 올린 분들을 살펴보는것도 우리 고령신씨문중의 역사로 기록이 될 것입니다.



1.장흥부부인 申씨(8世)ㅡ정언공파(   미상 ㅡ1504 약75세추정    )


부부인은 년도미상 년 에 태여나시여   연산왕이 재위중에 작고하신 분입니다.

조선왕 제  9 대 성종의 정식 왕후(제헌왕후)의 생모가 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조선 왕 제 10  대 연산왕의 외 할머니가 되시는 것입니다.


함안부원군 윤기견(무)에게 출가하여 후일 제헌왕후 윤비(성종임금의 비)를 낳아서 성종임금의 정실 왕후인 중전으로 역사에 오른인물이 바로 장흥부부인 신씨의 외동 딸인 것입니다.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윤비가 역대 왕중에서 성종임금의 여성편력이 심하여 부부간에 불화로인한 임금의 얼굴에 흠집을 내여 폐위하여 사가에서 일반인으로 격하되여 노모인 장흥부부인 신씨와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는중 성종임금이 연산의 생모이므로 측은이 여기여 다시 입궁시키려 상궁들을 사가로 보내여 생활들을 살피도록 하였습니다.


성종임금은 윤비를 다시불러들여서 중전으로 앉히려 하였으나, 평소에 감정이 좋지않던 성종임금의 생모인 인수대비가 중도에 사실과 다른 나쁜 면들로 성종에게 보고토록 사주를 하여 마침내 사가에서 사약을 마시고 죽임을 당하는역사적 사건이 발생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은, 추후에 조선역사에서 피 비린내가 진동하는 역사의 장을 당연하게 마련하였던 것입니다.


제헌왕후 윤비께서 사약을 받고 죽을 시애  입고있던 옷에 피를토한 것을 보관 하였다가 자신의 아들 연산이 등극한후에 왕에게  전하여 어미의 한을 풀어 달라는 윤비의 애절한 마음을 연산왕(외손자)에게 전달하여 역사적 소용돌이를 일으킨 장본인이 바로 장흥부부인 신씨이신 것입니다.


돌이켜본다면 ,

당시의 시대적 실상으로는 많은 잘못이 있는것으로 역사적 기록들이 남아있으나, 오늘날의 시대적인 상황인식으로는 그리 흠결이 많은 사건은 아닐 것이라 봅니다.


후일 연산왕이 등극하여 어머님이였던 윤비의 전후 사정들을 모두 파악하여 처결한 많은 사건화한  연산왕의 처신은 많은 비판을 받아서 마침내 이복동생인 중종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되여 생을 마감 하였던 연산왕의 심정은 과연 평범한 우리들과는 여러면에서 다름이 많았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동정이 가는 마음이 큼니다.


장흥부부인 신씨는 연산왕 재직시에 많은 전답과 호사스런 하사품들로 외할머님의 예를 받고 노후의 생을 누리다가 연산왕 재직시에 작고하시니  연산왕은 사후에도 극진한 예로써 모셨음이 역사에 기록으로 남아 젼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는 부부인 신씨를 그리 좋은 인물로 평하지를 않으나 자신의 몸으로 낳은 딸의 사실과 다른 보고로인하여 비극적으로 억울한 삶을 마감하였는데, 어느부모인들 눈감고 나 몰라라 할 사람들이 그리 많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말로는 너무했다고들 하나 자신의 입장이였다고 한다면 장흥부부인의 마음과 별로 다를것이 없었으라라 생각이 드는것이 보통 사람들의 판단일 것입니다.


장흥부부인의 혼사는 정언공과 형제지간이였던 암헌공 신장(참판)공과 4촌지간인 보한재(영의정) 신 숙주공이함께 조정에 출사중이던 윤기견(무)를 연결하는 역활을 하였음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부부인의 묘소는 남편과합영으로 경기도 개성 풍덕태곡해좌이나 남북이 분단으로 갈 수가 없어 서 후손들이 힘을 모아서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동 산 58ㅡ1에 설단을 마련하여 함안윤씨 후손들이 양력 10월3일에 제레를 올리고 있습니다.



2.의렬정려 義烈旌閭,貞부인 申씨(14世)ㅡ영성군파


14세 의렬정려 義烈旌閭 貞부인 신씨는 소현세자빈의 외 할아버님이신이신 13世 신식 (졸재공,대사헌,대사성, 도승지,관찰사, 참판)의 제1여식 입니다.


당시 성운(대곡)선생의 제자인 간서재 재김덕민(추후 종2품)공의 부인으로 출가하여 2딸을 두고있을시에 임진왜란을 당하니 시부모님들이 피란을 종용하여 큰 딸과 속리산 깊은 산중으로 피난길 중도에 왜병들을 만나서 놈들로부터 신체적인 손찌검을 당하자 여자의 정조와 조선여인의 기개를발휘하여 지니고있던 은장도로 왜병놈들을 죽이고 마침내 왜병들로부터 비참하게 큰딸과 함께 난도질을 당하여 목숨을 잃게 되신 분이십니다.


당시 보은 목민관의 장계를 접한 선조임금님은  여자에게는 하사하지 않던 의,열을 모두 갖춘 정려를 하사하시는 특별한 조치를 단행하였던 것입니다.


보통 여자들이 지조를 지키고 순결을 강조하였을시에는 열녀의 예를주었으나 특히 정부인 신씨는 왜병을 단검으로 죽이고 비참한 죽음을 당하였기에 남자들에게 내리던 의 義를 더하여 의열정려를 내리셨던 것입니다.


뿐만이 아님니다 당시 조선내에서 가장 이름있는 문장가인 최립공의 정부인의 장한 죽음을 칭송하는 글들 뿐만이아니라 이름있는 문장가들의 많은 시 문들로 칭송함이 넘쳐 났었던 것입니다.


살아있던 작은 딸은 남원윤씨   윤효전공.대사헌엮임)에게 시집을 가서 후일 남인의 영수요 걸출한 정치인이자 학자인 윤휴(1717ㅡ1680)(찬성엮임)공을 낳아서 조선 역사에 그이름을 날렸던 것입니다.

특히 서인의영수요 당시 문장가요정치인이였던 송시열(좌의정엮임)과 대적한 걸출한 정치가요 학자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후손들의 빛나는 역사적 인물로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의렬 정려 정부인 신씨의 곧고 알찬 정신과 가르침을 본받고 잊지를 않았기에 가능하였을 것입니다.


의렬 정려 정부인 신씨의 정려문은 시집의 고향인 충북 보은군 보은읍 종북리(안북실마을)에 현존하고있으며,

묘지도 안북실마을에서 바라다보이는 앞 산에 있습니다.



3,정경부인 申씨(14世)ㅡ영성군파


정경부인 신씨는 의열 정려 정부인 신씨의 2째 여동생입니다

그러하니 졸재,신식공의 3째 따님이신 것입니다.


당시 과거에 입격하였던 강 석기공(우의정)과 혼인하여 후일 소현세자(인조의 장자)빈인 강빈은 바로 정경부인 신씨의 따님이신 것입니다.


당시 나라의 운명이 청나라의 침략으로 조선의 임금인 인조대왕이 항복하니 소현세자내외,봉림대군,삼학사.그리고 무고한 수 많은 백성들이 인질과 전쟁 전리품으로 청나라로 끌려가는 치욕의 역사기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소현세자와 강빈은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갔으나 조선의 기개를 굽히지않고 오히려 청나라 조정과 왕의 자녀들을 가르치면서 인질 생활을 하였음은 청의 역사에도 기록으로 남아 전해지며 사실상의 자유로운 생활을 보장하여 주어서 손수 농사를 지어서 환곡하여 끌려온 백성들을 보살피면서 후일을 기약하였습니다.


차후에 귀국시에 국력을 튼튼히 하고져 세자빈인 여자의 몸인데도 당시의 여건을 잘 이용하여 국제무역을 통한 거래로 부를 축적하여 인질로 온 백성들을 환속하여 조국으로 돌려 보내기도하였습니다.


또한 새로운 서양의 무기등을 사들이고 연구하여 차후 귀국후에 조선을 강대국으로 만들려는 야심으로 인질 생활을 조선의 도약의기회로삼았 던 것입니다.


마침내 인질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였으나 국내사정은 이분들을 멀리하고 인조의 후궁들의 중상모략과 이간질등으로 세자도 시름시름앓다가 원인모르게 사망을 하니 또한 세자빈에게도 인조임금을 시해하려 한다고 모함을 하여 마침내 사약을 내리고 강빈옥사를 만들어서 많은 무고한 금천 강씨 일문을 역적으로 몰아서 70여년동안 후손들씨를 말리다시피 하였던 것입니다.


이때에 소현세자빈의 모친 신씨도 함께 69세의 노인인데도 장살형을 내려 죽임을 당하시여 그 시신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묻혀있던 것을 금천강씨 대종손인  강연범씨가    15여년전에  당시 기록들을 수집하여 시신을 수습하여 부군인 우의정 강석기공의    묘옆에 모셔져서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강빈옥사가 있는지 70여년동안에 금천강씨들은 뿔뿔이 전국에 흩어졌다가 숙종임금이 부당함을 밝혀 복권을 하니 다시금 세상의 빛을 보게 되였던 것입니다.


지금의 광명시에서 안산시로가는 길가 좌측의 애기능 저수지 옆 산중턱에는 영휘원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소현 세자빈 강빈의 묘소이고 어머님 정경부인 신씨의 묘소는 영휘원 가기전 2번째 산줄기중턱에 있어서 가을시향에 몸소 찾아 지난역사의 아픔을 되 짚어 보았던 것이 4년전의 일입니다.


소현세자빈 강빈의 나라사랑정신과 국제적 무역의 정신에는  어머님이신 정경부인 신씨의 피기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경기도 광명시 노온사동 능안골에 금천강씨 묘소들이 모여 있습니다.



4.부용당 (산효각)申씨( 18 世. 1732ㅡ1791)순창공파


부용당(산효각) 신씨는 조선영조시 문장가로 이름을 날리시던 석북(신광수)공의 누이동생입니다.


부용당신씨는 부친 신 호(첨추)공의 3남1녀의 외동 딸입니다. 

석북선생과는 어머님이 다른 이복 여동생이였으나 의좋고 화목한 남매지간이였습니다.


위로 3오라버니들이 시문에 능하여 그러한 연유로 부용당께서도 자연스레 시문을 접하다 보노라니 우리나라 여류 문인중에 이름을 올리는 분으로 시문에 능하였던 것입니다.


학자요 문장가인 공제 윤두서공의 넷째아들의 아들인  윤운 에게 시집을 가서 일생을 여염집에서 보내신 분이십니다.

 

남기신 시문들은 시집가기 전에 친정에서 3오라버님들과 함께 작문을 한 것들로친정형제들의문집인 "숭문연방집"에 "산효각 부용시선집"이라고 씌여져  오늘 날까지도 내려오고 있습니다.

 

당시공제 윤두서의 넷째아들 윤덕훈 후손가문은 궁핍한 생활로 인하여 부용당께서는 시문에 접할 기회가 적었고 생활고에 시달리신 기록들이 여러곳에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러하니 자연스례 시집오기전의 작품활동만이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부용당의 글들은 친정 3오라버니들의 가풍에의한 여성존귀의 분위기에서 자연스럽 이루어지니 그 문풍는 풍요롭고 감성적인 면모가 곳곳에서 나타났던 것입니다.


고령신문들은 특히 영조왕 초기의 이인좌의 란으로 18世 신천영공이 중추적인 인물로 참여하였던 관계로 벼슬길에 오르는것을 차단하였으나 서천지역의 신문은 많은 제약이 적어서 영조시에 벼슬길에 나아가게 되였으며, 석북 신광수공은조정에 근무하면서  노모를 즐겁게 하여주고져 기로과에 응시하여 합격을 하니 노모께서 무척이나 기뻐하였다고 전해 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여자로서의 한계를 넘어서 시문에 마음놓고 몰두할 수 있었음은 가풍의 詩 文 을 숭상하고 남녀의 차별을 하지않았던 가문의 기풍이 있었음에 가능하였던것이니 당시의 시대적상황에서 부용당 가문의 남녀 평등의 가풍을 가눔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용당신씨의 글을 보노라면,춘사,추일 에서는 봄과 가을의 정서를노래하고,전가락이란시는 전원에 사는 일상의 즐거움을 노래한 시입니다.

추후 상세히 문장과 시문을 별도로 소개할것입니다.

 

출가후의 생활이 좀더 여유로웠다며는 조선 여류 문장가중에서도 가장두두러진 업적을 남기기에 손색이 없었을 것이라 믿습니다.



5.女子독립군 申순호지사(26世) .소안공파(  1922,1,22 ㅡ2009     )


여자독립군 신순호지사는 독립지사인 아버님 삼강 신 건식공(임정 재무차장)의 따님이십니디.


또한 부군이신 박영준장군(1915ㅡ2000.육군소장,9사단장,정훈감,한전사장)도 부친 박찬익공(임정국무위원)과 함꼐 독립군으로 활동하다가 임정 주석이셨던 김구 선생의 주례로 부부의 연을 맺은 분이십니다.


그러하니 자연스례 예관 신규식선생(임정 국무총리)와 박찬익국무위원과는 조카딸인 신순호 지사를 잘 알게 되였던 것입니다. 

여사는 여성으로써 독립운동의 연락업무등으로 활약하여 정부로부터 대한민국건국유공자의 훈장을 추서 되셨습니다.

 

특히 여사 부부는 신순호지사의 고향인 청주시(종전 청원군) 가덕면 인차리에 소재하고있는 가덕중학교에 도서관을 신축하여 무상으로 충북도교육청에 기증한 장 본인들 이십니다.


또한 부부독립지사께서는  사후에 그분들의 자녀분들이 유품 2,000여점을  경기도 박물관에 모두 기증하였습니다.

이러한 귀중한 유품들은 후손및 후세사람들에게 전해지면서 영원무궁토록 우리 고령신문의 빛나는 업적을 선양할 것이 틀림 없는 것입니다.


특히,유품중에는 부부의 결혼증서가 붉은 단자에 다음과같이 기록되여 증서로써 간직하였던 것으로  드믐 사례입니다.


결혼 증서 


신랑  ㅡ 박영준

신부 ㅡ  신순호

소개  ㅡ 민필호

증혼 ㅡ 조소앙,엄항섭

주례 ㅡ김 구


이와 같이 역사의 가운데에 서 있었던 신순호지사와 부군인 박영준 지사의 숭고한 애국애족정신은 사후에도 영원히 꺼지지 않는 민족의 등불이 될 것입니다.


이분들은 서울동작동 국립현충원의 임정요원묘역(예관 신규식공)과 독립지사(삼강신건식공)묘역에 이웃하여 영면들을 하였으니 사후에도 질긴 인연의 끈은 어쩔수가 없는 것인가 봅니다.


그이름도 자랑스러운 고령신문의 딸 신순호지사!

편안히 영면하시라!



6.申 매자 여사(25世.1917ㅡ2016.4.6)ㅡ감찰공파


여사께서는

전 정보통신부차관을 엮임하신 윤식(11대 대종회 회장엮임) 씨의 누님이십니다.


여사는 향리 전남 고흥군 에서   전 노동청장과 제주도지사를엮임한  박  상렬 공과 혼인하여 슬하에 3 남  2녀를 두고 화목한 가정을 이루면서 남편을 출세하는데 정력을 쏱아부은 분이셨습니다.


여사는 89년의 세월동안 고령신문의 여식임을 늘 자랑과 긍지를갖고 생활하였으며 자녀들의 교육과 인성 함양에 게을리하지 않은 관계로 모두가 명문대학을거쳐 의사,박사,고위관료등으로 사회와 국가에 헌신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사자신도 수십년간 이화여대의 평생교육프로그램을 이수하면서 학구열과 품성함양에 부단한 채칙질을 하신 분이였습니다.


특히,유족들은  부모님의 유지에따라서 부친사망시에는 향리인 고향 고흥군에 1000만원과 모친 사망시에도 고령신씨대종회에 인재양성에 사용되도록 장학금 1000만원을 쾌척하시여 여사님의 숭고한 애종정신을 계승토록 함은 우리고령신문의 여인으로써의 평소의 긍지를 드높여 주었던 것입니다.


신 매자여사야 말로 우리 고령신문이 고흥지역의 중심에 있음과 있을 수있는 주춧돌의 역활을 심어놓고 가신 고령신씨의 빛나는 딸인 것입니다.



7.天才자매  27世 申수정,申수희자매

 

신수정피아니스트는 1943년생으로 서울대학교 음대를졸업하고  미국에서 유학하고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떨친사고령신문의 여인입니다.


그이전 어릴적부터 보기드믄 피아니스트로 성장하리라는 원로 피아니스트및 언론들은 유심히 지켜보았던 인물이였습니다.


동생 신수희여사는 전국대학 입시 시험에서 전국1위를 차지하고  서울대 미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서양화유학을 한 수재입니다.

 미국유학파중 제1호의 기계공학박사로 이름을 떨친 배순훈(전 정보통신부장관)과 부부지간입니다.


그러니, 수정씨와 수희자매는 서울대학교를 졸업시에도 모두 수석졸업의 영예를 누렸으니 대한민국의 수재중의 수재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부친 申집호공(교육자 .서예가,서울시 부교육감엮임)의 자매로 태여 나서 우애있게 자란 분들입니다.

언니 수정씨는  서울대음대학장을 엮임하고 대한민국 예술원 종신 회원으로 오로지 예술혼을 발휘하는 후학양성과 예술계 발전에 전념하면서 조용한 예술계의 별로 빛을 발산하는 것입니다.


동생 수희여사는 미술을 전공하고 부군을 보필하여 자손교육과 전공을 살려서  부군이 장관을 엮임한 경력에도  몇 단계 하급직에 해당하는 정부에서 공개모집한 현대 미술관 관장(1급)으로 임명되여 봉직할 때에도 수희씨의 전공을 살려서 현대미술관 운영에 사실상 주도적인 엮활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와같이 수정 ,수희씨 자매의 예술 혼은 우리역사에 꺼지지 않을 것이며,우리 고령신문의 크나 큰 영광으로 자리 잡을 것입니다.

우리고령신문 여성들의 귀감이 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커다란 족적을 남기게 될 것입니다.


**추후 부친 신집호공 개별 집필시에  상세하게 기술할 것입니다.




8, 대한민국최초의 1급 공무원 승진,정무차관 27世 申 태희(秀)여사 (강원백파)


대한민국 정부에서 정무차관으로 봉직한 유일한 우리신문의 여성이십니다.


항상 뒤 따라다니는 대한민국 여성공무원 중에서 최초로 1급에 승진한 장본인이란 꼬리표인 것입니다.

1996년 1월 서울시청의 관리관의 여성정책 보좌관으로 임명이 되였던 것입니다.


당시 언론들은 우리나라 공직사회에서 여성들의 입지가 상승하는 견인차적 역활의 주인공으로 조명들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례로 그 후에는 정부조직의 각 분야에서 여성들의 승진의 기회가 많아졌으며 오늘 날에는 두두러진 현상으로 나타나는  남녀의 벽을 깨트리는 시금석 역활을 바로 우리 신문의 신태희여사가 이끌었던 것입니다.


태희 여사는 서울에서 출생하여 1959년 고려대학교 법과를 졸업한 수재입니다.

1964년 숙명여대 대학원에서 가정관리학을 전공도 하여 여성리더로으로써의 자질을 모두 겸비하셨던 것입니다.



김 영삼정부시절 8대 정무차관(1997,11,20ㅡ1998,03,02)으로 임명되여 봉직한 우리고령 신문의 유일한 여성 차관으로 기록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성의 몸으로 당시에는 힘들었던 가정생활과 공직생활을 흠결없이 수행한 관계로  정부의 정무직으로 대통령에게 발탁되여  무난하게 그 임무를 완수함은 바로 우리 고령신문의 딸이였기에 가능하였을 것입니다.


지금도 누지를 마다하지 않고 전국을 누비면서 여성의 지위향상과 국민생활에 도움이 되는 실천적 삶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는 신태희차관은 앞으로도 대한민국을 이끌 여성지도자중에서도 걸출한 지도자로써 족적을 남기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것입니다.

진정한 고령신씨가문의 여걸임이 입증 되는 것입니다.


**추후에 별도의 기획으로 집필을 약속합니다.

 


본 집필 순서는,

1.역사적으로 오래 된 순서와

2.현존하지 않는 사망자를 우선하였으며,

3.연령은 어리지만, 사회적,국가적인 활동에서  그 이름들을 먼저떨친 분들 순으로 집필하였음을  밝혀 드림니다.

 

 

 

 

 

2016년 10월 6일 오후에

 

향 암    신      원  호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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