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자 신잠(靈川子 申潛) 선생은 누구인가?
영천자 신잠(靈川子 申潛) 선생은 누구인가?
영천자 신잠(靈川子 申潛) 선생의 휘(諱)는 잠(潛)이요 자(字)가 원량(元亮)이며, 호(號)는 영천자(靈川子) 또는 아차산인(峨嵯山人)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요 문인으로 보한재 신숙주(申叔舟)공의 증손자이며, 봉례공 신주(申澍)공의 손자이고 삼괴당 신종호(申從護)공의 넷째아들이다. 1491년 아버지 삼괴당(三魁堂) 34세 때에 어머니 전주이씨(全州李氏)와의 사이에 4남 2녀 중 넷째 아들로 출생하여 1554년 12월 4일 돌아가시니 향년 64세이다. 1513년 23세 때에 진사시에서 장원으로 급제하고, 1519년 4월 13일(기묘년 중종 14년) 29세 때에 문과 현량과(賢良科) 병과 7등으로 합격하여, 예문관 검열(檢閱)로 있을 때 1519년 11월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파과되어 파직, 1521년 10월 신사무옥(辛巳誣獄)으로 전라도 장흥(長興)에 17년 동안 유배되었다. 이때 홍패(紅牌)와 백패(白牌)를 읊은 시(詩)가 전한다. 1543년(중종 38) 11월 53세에 다시 등용,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태인현감(泰仁縣監)·간성군수(杆城郡守) 등을 역임하고 1552년 4월 25일(임자년 명종 7년) 62세에 상주목사(尙州牧使)에 부임하여 재직 중 1554년 12월 4일 현직에서 돌아가시었다. 특히 태인현감으로 있을 때에는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부모처럼 받들었다는 현감 신잠선정비(縣監申潛善政碑)가 있다.
《병진정사록》에 의하면 시·서·화에 모두 능하여 삼절(三絶)이라 하였으며 《패관잡기 稗官雜記》에는 특히 묵죽(墨竹)에 뛰어났다고 하였고, 《연려실기술》에는 묵죽과 더불어 포도 그림도 잘 그렸다고 하였다. 편저에 《고령세고(高靈世稿)》, 저서에 《고령세고속편(高靈世稿續編)》, 그림에 《탐매도(探梅圖)》ㆍ《화조도》, 편액은 긍구당(肯構堂) 등이 있다.
처남이자 제자인 옥계 노진(玉溪 盧禛)공이 지은 영천자의 행장에 보면 배위는 초취(初娶)가 당해부수 전주인 이붕구(李朋龜)로 슬하에 2녀를 낳으니 큰 사위가 감찰 한수(韓洙)요 작은 사위는 생원 강완(姜浣)이고, 후취가 풍천인 노우명(盧友明)의 따님이다. 시비(侍婢)에게서 아들을 낳았는데 영천자(靈川子)가 돌아가실 때에는 겨우 6살이라 하였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으며, 장흥예양서원(長興汭陽書院), 태인무성서원(泰仁武成書院), 상주옥성서원(尙州玉城書院)에 배향되어 있다. 묘소는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산15번지 아차산에 아버지 삼괴당(휘 從濩) 묘소 우측 임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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