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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퍼온글
ㆍ작성일 2012-02-18 (토)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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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申叔舟)와 성삼문(成三問)
신숙주(申叔舟)와 성삼문(成三問)


 

지은이 : 신복룡(건국대학교 대학원장 역임)

 

우리 세대의 많은 사람들은 젊은 날에 이광수(李光沫)의 소설 하나쯤은 읽고 감동을 받았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나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꿈많던 학창시절에『흙』을 읽으면서 낭만적인 생각을 가져보기도 했고,『단종애사(端宗哀史)』를 읽으며 훌쩍거린 적도 있다. 특히 『단종애사』는 어린 시절의 나에게 깊은 감동과 함께 역사학에 대한 관심을 일깨워 주었다.



 

비분강개(悲憤慷慨)의 역사학

 

그런데『단종애사』를 읽은 대부분의 독자들의 독후감이란 비분강개할 수밖에 없었다. 독자들은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의 절의(節義)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반면에 수양대군(首陽大君)과 그의 추종자였던 신숙주에 대한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특히 성삼문이 국문(鞠問)을 당하고 죽던 날 신숙주가 집에 돌아오니 그의 아내 윤(尹)씨가 남편을 향하여 오랜 동지인 성삼문과 함께 절의(節義)를 지켜 죽지 않고 돌아온 것을 힐책하고 부끄러워하면서 다락에 올라가 목을 매어 자살하는 장면에서는 더욱 비감(悲感)함을 금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야사(野史)를 기억하고 있는 우리는 신숙주와 성삼문의 정치적 공과나 선악을 따질 때면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성삼문의 편을 드는 데 익숙해졌 다. 성삼문은 의인이요 신숙주는 비겁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신숙주와 성삼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그와 같은 소설적 공간에서 있었던 것과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특히 신숙주에 대한 평가는 더욱 그렇다.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은 사은사(謝恩使)가 되 어 명나라로 떠나는데 이때 신숙주가 동행했다. 수양대군의 일행은 공식적인 업무가 끝나자 도성인 연경(北京)으로부터 다소 떨어져 있는 영락제(永樂帝)의 장릉(長陵)을 찾아간다. 영락제는 명나라 태조(朱元璋)의 넷째 아들로서 부왕이 죽고 그의 장조카인 혜제(惠帝)가 등극하자 그를 죽이고 스스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영락제는 평소에 ‘나의 패륜은 세월이 흐르면 잊혀지겠지만 나의 위업은 역사에 오래도록 기록될 것’ 이라고 말했다. 그는 과연 자신 이 말한 대로 명나라 3백년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러한 영락제의 능 에 나란히 절을 하면서 수양대군과 신숙주가 무엇을 생각했을까를 짐작해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들은 서울로 돌아와 개성의 궁지기인 한명회(韓明澮)를 만나게 된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수양대군이나 신숙주는 서울에 이르기 전에 이미 그들의 앞날을 결심했다고 볼 수 있다.

 

절의(節義)와 현실은 두 날개와 같은 것

 

이와 같은 정치적 오리엔테이션을 체험한 신숙주와는 달리, 성삼문은 정치적인 것보다는 학문적이며 유교적인 성향을 더 짙게 갖추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에게 정치적 경륜은 그리 중요할 것이 없었으며,그의 궁극적 관심은 충군과 절의, 그리고 학문이었다. 이 두 사람은 20세 의 젊은 나이 1438년에 함께 과거에 합격하여 성삼문이 서른여덟 살, 신숙주가 서른아홉 살이 되던 해에 헤어졌으니 20년 가까운 친교가 있었던 셈이다. 벼슬길에 갓 올랐을 때만 해도 그들은 혈기와 앞날에 대한 부푼 꿈에 젖어 굳이 다툴 것도 없었고,피할 일도 없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자신의 주변을 스쳐가는 세상 풍파를 겪으면서 그들은 각기 사물을 보는 시각을 교정하기 시작했다. 신숙주는 현실이 중요한 것이며 남는 것은 인간이 성취해 놓은 업적이라고 생각했고,성삼문은 이상이 중요한 것이요 남는 것은 대의라고 생각했다. 성삼문의 이러한 생각은 단근질이나 죽음으로써도 돌이 킬 수 없을 만큼 꿋꿋한 것이었다.

 

성삼문은 죽어가면서까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신숙주는 단종(端宗)의 폐위와 죽음이 목숨을 걸만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 았기 때문에 죽지 않고 살아남아 자신의 갈길을 갔다. 신숙주가 자신의 학문적ㆍ정치적 벗들이 참형을 당하는 순간에 함께 죽지 않았을 때 인간적인 괴로움이야 없지 않았겠지만,자신을 부끄러워했다 고 볼 수는 없다. 그는 자신이 살아남아 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다. 왕정의 비능률성이 인위적으로 제거되지 않는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신숙주는 사직을 생각한 것이지 일신의 영달을 도모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신숙주와 성삼문의 만남과 헤어짐에는 두 사람 모두 가상하고 장한 데가 있다. 신숙주는 살아남아서 영락제의 무덤 앞에서 결심했던 바를 이룸으로써 조선조 5백 년 왕업의 초석을 이룩했다.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건국 초기의 불편했던 조일(朝日) 관계를 정상화 시켰고, 강원도와 함길도(咸吉道)의 체찰사(體察使)로 파견되어 여진(女眞)의 침략을 막았으며,몇 십 년 동안 예조판서와 병조판서로 국가에 봉사했으니 당태종(唐太宗)에게 위징(魏徵)이 있었듯이 세조(世祖)에게는 신숙주가 있어 수성(守成)을 이룰 수가 있었다.

 

성삼문은 젊은 나이에 자신이 확신했던 바를 목숨과 바꿨으니 그 또한 훌륭한 일이다. 그는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를 위해 열세 번에 걸쳐 요동의 황찬(黃瓚)을 찾아가 만났고, 집현전 부제학이 되어 영화가 보장되었으나 세조의 찬위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는 세조가 통치한 기간에 받은 봉록을 한 푼, 한 알도 쓰지 않고 곳간에 쌓아두었으며, 죽음 직전에는 거적을 깔고 살 정도로 곤궁했으나 절개를 굽히지 않았으니 그 또한 비범한 일이었다.

 

이광수(李光洙)의 실수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렇다’고 말하는데 홀로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니다’라고 말하는데 홀로 ‘그렇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이 용기가 필요하다. 만약 신숙주가 성삼문의 편이 되었다거나 성삼문이 신숙주의 편이 되었더라면 역사는 오히려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항복 문서를 작성할 때 그것을 찢으며 통곡한 김상헌(金尙憲)이나,찢어진 항복문서를 다시 붙이는 최명길(崔鳴吉)에게 모두 깊은 속뜻이 있고 훌륭했듯이,성삼문도 훌륭했고 신숙주도 훌륭했다. 그러므로 신숙주는 성삼문의 고집을 야속타 할 것도 없고, 성삼문은 신숙주의 처신을 괘씸하다 탓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각기 갈 길을 갔을 뿐이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성삼문은 의인이요 신숙주는 비겁자라는 논리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역사 소설과 텔레비전 연속극의 탓이다. 자살은 커녕 멀쩡하게 살아서 부귀와 복락을 누리다가 생애를 마친 신숙주의 부인 윤씨를 자살하게 만드는 식의 소설적 허구가 우리의 역사학을 병들게 하고 있다. 물론 소설과 정사(正史)를 구별하지 못한 독자에게도 책임이 있고 독자들에게 정확한 역사자료를 제공하지 못한 학자들의 게으름에도 책임이 있지만, 그 일차적 책임은 작가에게 있다. 셰익스피어나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郞)나 홍명희(洪命熹)의 작품이 위대한 것은 그들이 소설적 흥미를 잃지 않으면서도 역사의 큰 흐름을 왜곡시킨 예가 없기 때문이다.

 

연속사극의 책임

 

한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역사에 관한 지식을 얻는 매 개체로는 신문이 38.8%, 연속극이 33.1%, 잡지가 9.2%, 역사소설 이 8.3%, 전문 서적이 7%, 역사 강좌가 3%로 나타나 있다. 연속극 이나 소설의 영향력(41.4%)은 그만큼 높다. 이울러 이 통계는 작가들 에게 얼마나 열심히 공부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동시에 독자들이 얼마나 편하게 역사 공부를 하려는지도 잘 보여주고 있다.

 

결국 역사 공부는 필자 독자ㆍ독자ㆍ매개자 모두에게 노력과 투자를 요구하고 있다. 요즘 서점가에 지천으로 깔려 있는『한 권으로 읽는 ᄋ ᄋ ᄋ』유(類)의 책을 보면서 독자와 필자가 역사를 얼마나 안일하 게 생각하고 편하게 읽으려 하는가를 보는 듯하여 나는 마음이 편치 못하다. 천장 보며 역사소설을 쓰는 시대가 지나갔듯이 연속극이나 소설을 보며 역사공부하던 시대도 이미 지나갔다. 역사학에 대한투자와 노력을 게을리 한 업보가 지금 일본 교과서 왜곡 파동을 통하여 아리게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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