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방
ㆍ작성자 고천군파
ㆍ작성일 2015-06-09 (화)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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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군 절(靈原君 梲)공은 누구인가?

영원군 절(靈原君 梲)공은 누구인가?

 

영원군(靈原君)의 휘()는 절()이시며 호()가 천봉당(天捧堂)이요, ()는 자경(子擎)이시다. 1596년 병신년 선조 29년 생부 소안공파 경문(景汶)께서 27세 때에 생모 순천박씨(順天朴氏:1571~1642) 사이에 둘째 아드님으로 출생하시어 1688727일 숙종 14년에 돌아가시니 수() 93세이다. 삼촌 고평군 수기(高平君 守淇)공에게 양자로 입보되시었다. 서계 이득윤(西溪 李得胤)선생에게서 큰아버지 경담(景淡)공과 함께 수학하였으며, 1675년 윤51(을묘년 숙종 1) 80세 때에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되시고 영원군(靈原君)의 봉호(封號)를 받으시었다. 영원군의 40세 때인 1635721일 승정원일기에 보면 사과(司果) 신절(申梲), 생원(生員) 장류(張留)허장(許嶈) 등의 딸은 혼인을 금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혼인을 허락하라.”로 보아 인조 후궁 간택에서 삼망에 오른 일이 있으며, 영원군 70세 때인 1665915일 작성한 재산노비 분급기에 보면 어모장군(禦侮將軍) 행 충좌위 부사과(行 忠佐衛 副司果)를 지내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1680년 윤 85일 숙종 7년 승정원에서 좌승지 이단석(李端錫)이 내린 열성어필첩(列聖御筆帖)이 지금도 전해오고 있다. 생가의 아버지는 소안공파 14세 경문(景汶)이시고 할아버지는 13세 동지공 옥()이시며 증조는 12세 석회(碩淮)이시고 고조는 11세 탁()이시며 5대조 10세 복순(復淳)이시고 6대조가 문충공의 다섯째 아드님이신 9세 소안공 고양부원군 준()공이시다. 배위는 정부인 파평윤씨(貞夫人 坡平尹氏)와 정부인 신평이씨(貞夫人 新平李氏)가 계신데 파평윤씨는 1녀를 낳으시고 어느 해인가 118일 일찍 돌아가시고, 어느 해인가 628일 돌아가신 신평이씨에게서 43녀를 낳으시니 큰 아드님이 필한(弼漢)이요 작은 아드님은 위한(緯漢)이시며 셋째 아드님이 조한(朝漢)이시고, 막내 아드님이 석한(錫漢)이시다. 큰 사위는 양천인 허류(陽川人 許塯)요 작은 사위는 전주인 이제렴(全州人 李齊濂)이시고 막내 사위가 상주인 황유서(尙州人 黃有瑞:부사)이시다. 영원군께서는 1650년경 청원군 가덕면 청용리에 입향하시어 돌아가실 때까지 지금의 가덕면 청용리 원청용 광호(廣浩)씨댁에서 범식(範植)고문의 생가까지 99칸의 집터에서 거주하시었다 한다. 영원군과 신평이씨 묘는 보은군 속리면 북암리 분화동 갑좌인데 이 묘소는 둘째 아드님 천경공 위한께서 유택(幽宅)를 찾으셨다 하며, 파평윤씨는 청원군 가덕면 한계리 간좌이다. 문의향교(文義鄕校)와 노봉서원(魯峰書院)청금록(靑衿錄) 올라 있으며, 1687년 정묘년 숙종 1392세 때에 문중의 원로로서 대사헌 신익상(申翼相), 승지공 신학(申㶅) 등과 함께 시조산소를 개사초(改莎草)하고 묘표(墓表)를 세웠으며,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없어진 규월암(奎月庵)을 중건하였다 하였고 성질이 무척 괄괄 하였다 한다. 묘소에는 애마의 무덤이 있고, 19773월 경운공 철우(哲雨)께서 지으신 묘갈명이 있으며 시향일은 매년 음력 102일이다. 종손은 수원에 사시는 희원(熙杬)이다.

 

가덕면 청용리 유래

 

1. 가덕면의 유래

청주에서 남동쪽으로 약 15지점에 위치한 면이다. 인조 16년 무인 9(1638) 인조께서 충청감사 김육(金堉)이 대동선언법(大同宣憲法)시행을 청함에 따라 보은 땅에 들어가고자 이곳에 행차하다가 작은 마을에서 하룻밤을 쉬게 되었는데 밤에 비록 좋은 이불과 베개는 아니었으나 몹시 잠자리가 편했고 또한 꿈이 편안하였다. 이에 인조께서 몹시 마음이 유쾌하여 아침 일찍이 기침하고 곧 마을 주변을 살펴본 즉 산세가 부드럽고 흡사 군자의 풍토를 갖추고 있었기에 시종에게 산 이름을 물었더니 현감이 말하되 도덕산(道德山)이라고 아뢰었다. 이에 임금께서 흐뭇하여 덕()은 인간의 길이니 더 바랄 것이 없으되 앞으로는 이곳 향인(鄕人)에게 지닌 덕에 더욱 덕을 더하도록 하여 군자의 덕을 터득하도록 하라고 유시를 내림으로써 후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덕을 더 한다라고 고을 이름을 더할 가()자 큰 덕()자 가덕(加德)이라 칭하게 되었다. 또 일설로는 인조께서 마을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던 날 홀연히 야심 경에 밖에서 은은한 풍악소리가 들림으로 괴이하게 여기어 발을 걷고 밖을 내다보니 앞산에서 황홀한 무지개다리를 밟고 백발노인이 이르는지라 인조께서 어인일이냐고 묻자 백발노인이 오래도록 명산정기(名山情氣)를 맡아 이곳 도덕산을 지키고 있는 산령(山靈)인 바 주상(主上)께서 가궁(假宮)에 이르시니 어찌 무심할 수가 없어 용안을 우러러 뵙고자 찾아 왔다고 하면서 장차 이 고을이 도덕과 선비의 고장으로 후세에 도덕이 숭상될 것이라고 말했다. 잠을 깨고 보니 한 밤의 꿈이었다. 황급히 밖으로 나와 앞산을 바라보니 영롱한 보라색으로 산봉우리가 물들어 엷은 밤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이윽고 날이 밝아 문의현감을 불러 앞산을 물어보니 도덕산이라 해서 임금이 덕을 더하도록 힘쓰라 한데서 그때부터 가덕(加德)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청원군 가덕면 중 인차리를 통칭 가덕이라 부른다. 도덕산은 인차리 남쪽에 솟아 있는 해발 320m의 산이다. 이곳의 산천정기가 워낙 덕성스럽고 그것을 지키는 수호신이 있어서 인지는 몰라도 예로부터 덕망 있는 학자와 선비들이 많이 배출한다고 전한다. 다른 곳은 몰라도 현재 이곳에서는 예의도덕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1991.2.10발행 문의향교지에서 발췌함.

 

2. 청용리 유래와 마을 자랑비

 

1) 위치

 

청용리는 가덕면 남부지역에 위치하며 동은 계산리, 서는 삼항리, 남은 문의면 마구리, 북은 인차리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청용리는 본래 문의군 동면의 지역으로써 청용사가 있었으므로 청용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금곡리, 능변리, 화산리를 병합하여 청용이라 해서 가덕면에 편입되었으며, 현재 능갓, 장자울을 1리로, 원청용, 꼴뫼, 지평리, 띠골을 2리로, 웃씨앗골(금곡=쇠골)3리로 분구하였다.

 

3) 청용마을 자랑비

 

-. 건립년월일:19941227일 재질:화강암

-. 위치 : 청원군 가덕면 청용리 원청용 마을

-. 규모 : 높이-110cm, 가로-160cm, 세로-110cm

-. 소요예산 : 200만원, 군비100만원, 자담100만원

-. 내용

우리 마을은 피반령(皮盤嶺)의 정기 받아 산맥이 남서쪽으로 뻗어 내려왔고 은실같이 흐르는 약수천변에 자리 잡아 대대로 이어 살으니 복 되도다 그 이름 청용입니다. 우리 마을의 위치는 동쪽은 계산리 서쪽은 행정리 남쪽은 노현리 북쪽은 인차리에 접해 있습니다. 위도 상으로는 북위 35° 33동경 127° 33에 위치한 동남향이며 세대수는 40세대 인구는 150여명이 서로서로 상부상조하는 살기 좋은 마을입니다. 마을 뒷동산에는 아담한 사당집이 있으니 이조 성종 즉위에 공을 세워 좌리공신에 책록되고 고천군에 봉해진 이조참판 신정(申瀞)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그 후손들이 매년 음력 310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 마을이 고령신씨의 세거주지가 된 것은 서기 1650년경 고천군의 6대손인 중추부사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정헌대부 영원군 신절(申梲)이 이곳으로 낙향하여 터를 잡고 살았으므로 그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고천군의 12대손인 담인 신좌모(申佐模)는 이조 고종 때에 이조참판 행직으로 꽃뫼에서 살았고 17대손인 단재 신채호 선생이 청년시절에 이 마을에서 신참판의 아들인 석헌 신승구 진사로부터 한문수학을 하였습니다. 그 후 이 마을에서 유림선사들이 속출하였으며 특히 한학 시인 신영식, 학자 신태식, 이우영 등은 그 후 학자로서 글을 가르치어 글방 문하생을 많이 배출하여 자연 전수 되면서 우리 마을 사람들이 경로 효친과 도덕심이 투철합니다. 매년 58일 어버이날에는 이 마을 청년들이 뜻을 모아 경로잔치를 마련하고 덕담과 담소로 유익한 하루를 보내기도 합니다. 전 충청체신청장 신범식은 신진사의 증손으로 청용사터에 있는 선대생가를 복원하여 소중하게 관리하고 있으며 마을회관 대지 3백여평을 마을에 희사하여 동민들로부터 찬사를 받고 있습니다. 이 마을은 고령신씨를 비롯하여 여러 성씨들이 상부상조하여 어울려 살고 있는 마을이기에 후손들은 이 고장에서 태어남을 긍지와 자부심으로 더욱 부모에 효도하고 사회에 봉사하는 훌륭한 인물이 많이 나올 것을 기대하며 마을 자랑비를 세웁니다.

서기 19941227

원청용 주민일동 신 명 수 근찬

  

꿈속에서 귀인이 점지해 준 영원군의 집터

1650년경 청용리에다 집을 지으려고 원청용 건너산 아래에 집을 짓기로 하고 대들보를 상량(上樑)한다. 대들보를 상량 한 후 하루 밤을 자고 나면 올렸던 대들보가 떨어진다. 다시 대들보를 상량을 한다. 자고 일어나면 또 대들보가 떨어져 있다. 하루는 영원군에게, 꿈속에서 귀인이 나타나 여기는 네 집터가 아니란다. ‘그럼 저의 집터가 어디오니이까?’ 여쭈니 건너편 청용사 자리란다.’ 그러면서 네 터에 집을 져야 자손도 번성하고 나라를 위한 인물도 많이 배출된단다.’ 다음날 청용사의 주지를 찾아가 간밤의 꿈 이야기를 들려주니 주지가 집터를 내어 준단다. 그 후 청용사는 죽산 어딘가로 이사갔다 하며 지금도 그 사찰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일까? 영원군의 후손들은 300여년 동안 2,000여명 이상으로 번성하였고 문과에 급제한 후손이 8명이요, 무과에 급제한 후손이 1명이며, 사마시 합격자가 15명이고, 애국지사가 2명이며 석박사와 고위공직자는 무수히 많다. 당시는 대가족사회다. 1665915일에 작성한 영원군의 재산노비 분급기에 보면 노비가 372명이나 되며 재산이 무척 많다. 100칸의 집을 짓고 싶은데 당시는 제도상 임금이외에는 100칸의 집을 지을 수 없으므로 99칸의 집을 지었다 하며 1칸은 처음 집을 지으려 했던 곳에 지었다 전한다. 아무튼 지금 그 집터가 광호공(廣浩公)의 집에서 시작하여 범식(範植)고문의 집까지라 한다. 이 집터 안에는 1896~1897년까지 단재 신채호선생께서 17~8세경에 공부하시던 사랑방이 지금도 있으며 고천군사우(高川君祠宇)가 있다. 구전(口傳)으로 전에 오던 이야기를, 동인공께서 들려주신 것을 정리하였다. 본 내용은 집터의 정확한 위치와 안성으로 이사 간 청용사를 찾아가 좀 더 고증을 해 보아야하겠다.

 

☞ ③영원군의 유택(幽宅)을 찾은 속리산중수도지리박통 천경공 위한(緯漢)

영원군의 아드님 중에는 속리산중에서 오래도록 수도를 하여 지리에 박식(俗離山中修道地理博通)한 둘째 아들 천경공 위한(天卿公 緯漢)이 계신다. 1650년경 천경공이 15~6세 되었을 때 어느 날 스님이 집에 와서 나를 따라 갈래하니 그렇게 하겠다하고 따라 나섰다 한다. 두 해쯤 지나서 집에 돌아오게 되었다. 성질이 불같았던 아버지 영원군께서 돌아온 아들을 보면 금방이라도 큰 일이 날 것은 뻔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에 어머니 신평이씨께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다 꾀를 내었다 한다. 동네사람들과 여차여차 하기로 미리 약속을 하고 술과 음식을 마련 초청하였다. 한창 주흥이 오를 무렵 천경공을 다락방에서 슬그머니 나오게 하니 영원군께서 양반이 어디 중놈이 될 수 있느냐하면서 금방이라도 죽일 기세인지라ㆍㆍ 이때 동네사람들이 지나간 일을 무얼 그러느냐? 자식이 집에 들어 왔으면 되었지!” 하며 만류하는 바람에 슬그머니 해결이 되었다 한다. 그리하여 속리산중수도지리박통의 별명을 얻은 위한은 결혼을 하여 두 분의 부인에 25녀를 낳았으나, 다시 가출하였다 한다. 그 후 속리산중수도지리박통은 부모 생전에 속을 많이 썩혀 드렸다 생각하고 아버지 영원군의 유택을 보은군 속리면 북암리 분화동으로 정하게 되었으며 죽어서는 아버님를 봉양하며 산다고 아버지, 어머니의 묘소 후미에 뭍히기를 원하였다 하며 다른 형제들의 명당자리도 손수 잡아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속리산중수도지리박통 아들 위한 때문에 명당을 찾아 보은군 속리면 북암리 분화동에 유택을 마련하여 모시게 되었다고 동인공(東仁公)께서 구전(口傳)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들려주신 것이 생각난다. 아마 천경공께서 배우신 공부는 당시 중인 이하 하류계급사회에서나 하는 풍수학을 공부하였던 것 같으며 영원군께서 바라는 공부는 유학을 하여 벼슬길에 오르기를 원하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 ④문의향교(文義鄕校)

 

문의향교는 현유(賢儒)를 배향하고 지방의 중등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하여 1259(고려 고종 46)에 문의현(文義縣) 서쪽인 지금의 양성산(養性山) 아래에 창건하였다. 1609(광해군 1)에 지세(地勢)가 불리하다는 이유로 남쪽인 기산리(箕山里)로 이건(移建)하였고, 1683(숙종 9)에 다시 지세가 평탄(平坦)하지 못하여 재이건(再移建)하였으며, 1719(숙종 45)에 한 차례 중수(重修)하였다.

청주목(淸州牧)과 문의현이 합병되면서 1888(고종 25)에 교궁(校宮)이 철폐되었으며, 1893(고종 30)에 현 위치에 교궁을 재건하였다. 1981년에 중수하고, 1988년에 보수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명륜당·내삼문(內三門외삼문(外三門) 등이 있다. 향교의 배치는 내삼문을 중심으로 전면에 강학 공간인 명륜당이 있고, 후면에 문묘(文廟) 공간인 대성전이 배치되어 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구조로 되어 있다.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하여 여러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곳으로 정면 3·측면 3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며, 명륜당은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으로 정면 4·측면 2칸의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외삼문은 솟을대문으로 되어 있다.

이 향교는 조선시대에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게 되었다. 현재 대성전에 5(五聖송조4(宋朝四賢) 및 우리나라 18(十八賢)을 배향하고 있으며, 매년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에 석전(釋奠)을 봉행하고 있다. 소장 전적으로는교임선생안(校任先生案)·청금록(靑衿綠)등이 있다.

주소 : 충북 청원군 문의면 미천리

전화번호 : 043-251-3226

 

☞ ⑤문의향교(文義鄕校)노봉서원(魯峰書院)의 청금록(靑衿錄)에 등재된 고천군 후손들

 

1. 청금록(靑衿錄)이란 성균관이나 향교서원에 있던 양반 유생들의 학적부(명부)로서 푸른색의 비단으로 표지를 만든데서 유래가 되었다 한다.

 

2. 문의향교 청금록에는 우리 고천군파 후손들이 300여년 동안 499명 중 17명이 등재되어 있다.

14경문(景汶), 15(), 16필한(弼漢), 17(), (), (), (), 18재청(再淸), 익청(益淸), 이청(以淸), 명청(命淸), 만청(晩淸), 우청(偶淸), 오청(五淸), 19이권(履權:로 기록됨), 익권(翊權:으로 기록됨), 태권(兌權)

 

3. 노봉서원 청금록에는 우리 고천군파 후손들이 269명 중 4명이 등재되어 있다.

15(), 16필한(弼漢), 석한(錫漢), 17세 혼()

 

4. 그 후 후손들은 1728년 무신난(이인좌와 신천영의 난이라고도 함)의 영향으로 30년 정거처분(停擧處分)을 받아 향교 입학이 불허되어 고령신씨 문청3(고천군파, 소안공파, 영성군파) 19() (), (祿)자 항렬에서 문의향교 청금록에서 현격하게 줄어들고 있으며 이후 후손들의 문과 급제 및 벼슬길에 오른 선조님의 수가 몇 분 안 된다.(본 사항은 더 연구해야 할 사항임)

 

애마(愛馬)의 무덤이 있는 영원군 산소

 

영원군 묘소가 있는 보은군 속리면 북암리 분화동에는 영원군께서 살아계실 때 타고 다니시던 애마(愛馬)의 무덤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318년 전에 돌아가신 영원군께서 무척 사랑하시던 애마였으리라. 당시는 교통수단이 말이나 가마였으니, 이 말은 영원군께서 92세 때에 청주에서 고령까지 시조산소에 가실 때에도 타고 가셨을 것이고, 문의향교에 가실 때에도 타고 가셨을 것이며, 아버지 생부 도사공의 묘소가 있는 백족산에도 타고 가셨을 것이고, 고천군산소가 있는 시흥과 암헌공 산소가 있는 파주와 문충공과 목사공과 영천군과 양부 고평군이 계신 양주에도 타고 가셨을 것이라 생각되며 옥과에 계신 순은호촌공의 산소에도 타고 가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도로에서 숨을 가파르게 쉬며 1시간 정도 오르니 산 능선 위에 용()의 응혈인 듯한 곳에 커다란 산소가 보인다. 한 눈에 보아도 영원군의 산소이시구나! 알 수 있다. 영원군 산소에서 30여 미터 산 능선을 더 오르니 산소가 또 보인다. 이 분이 바로, 아버지 영원군께서 살아계실 때 마음고생을 많이 시켜드렸다는 작은 아드님 속리산중수도지리박통(俗離山中修道地理博通)’ 천경공 위한(緯漢)이시라고 동행한 종수(鍾秀)종친이 이야기 해 준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 유학을 숭상하는 양반의 자손으로 도학을 공부한다 하니 불같은 성격을 가지신 영원군께서는 화가 많이 나셨으리라 미루어 짐작이 된다. 아무튼 지금의 속리산 국립공원내 160,000여평의 산 능선 위에 영원군할아버님을 중심으로 상하로 하여 3대가 잠드신 이곳을, 도학을 공부하신 천경공께서 찾아 유택으로 결정하셨다 한다. 풍수에 무례한 인 소생이 보아도 산 능선을 따라 굽이치는 용의 대혈은, 용암처럼 터질 것 같은 곳에 천경공 스스로가 그 곳에 묻히시어 살짝 눌러줌으로서 아버지 영원군의 자리에서 더욱 큰 응혈을 만들어 주는 형국이다. 좌청룡 우백호라 했던가? 풍수책에서나 봄직한 이름 그대로 좌청룡 우백호다! 참으로 명당이구나! 감탄하고 또 감탄하고 싶다. 묘소에서 보아 전면과 좌우의 수많은 산봉우리와 능선들이 영원군할아버지 묘소를 향해 부복하여 머리를 조아리는 듯한 형국은, 마치 좌우에 늘어선 만조백관들이 임금을 향해 부복하여 예()를 갖추는 형국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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