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방
ㆍ작성자 신석호
ㆍ작성일 2014-10-18 (토) 20:00
ㆍ첨부#1 해동제국기-일본_번역서-19911216.pdf (1,474KB) (Down:82)
ㆍ추천: 0  ㆍ조회: 1140       
ㆍIP: 122.xxx.8
"해동제국기" 일본 번역서 소개
오늘 “해동제국기”를 일본어로 번역한 책을 일본의 중고책방에서 구하였습니다. 1991년 이와나미 문고에서 출판된 책이며 사진으로 역어서 첨부파일로 올립니다. 첨부파일 : 해동제국기-일본번역서-19911216.pdf 보한재 할아버지께서 27세이던 1443년(세종 25년)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일본에 다녀오셔서 저술하신 해동제국기 (海東諸國記)는 1471년(성종 2년) 일본의 지세(地勢)와 국정(國情), 교빙내왕(交聘來往)의 연혁, 사신관대예접(使臣館待禮接)의 절목(節目)을 기록한 규장각도서입니다. 문화재 : 해동제국기 (서울 유형문화재 제311호) - 2010년 10월 7일 지정 저자는 일본의 언어학자로써 서언에 보면 해동제국기는 조선왕조 최고의 지식인이 일본의 류쿠(琉球)지역의 역사, 지리, 풍속, 언어, 교통의 시제 정보 등을 상세하게 기술한 총합적 연구서라고 적고 있습니다. 더욱이 한일관계사의 연구에 가장 중요한 역사자료라고 표현되어있습니다. 또한 책에 나오는 지도는 가장 오래된 일본 지도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보한재 할아버지의 업적으로 평가받는 내용을 정리하였습니다. 1. 신숙주는 임종하기 직전, 성종에게 "일본의 동태를 예의주시하되, 저들과의 화호(和好)만은 끊지 마십시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2. 《해동제국기》는 당시 일본에서 쓰던 공식 연호를 그대로 사용하여 일본의 실상에 보다 객관적으로 접근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일본의 고유 연호 사용은 이후 중국과의 외교문제에 큰 장애가 되기도 했다. 3.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서는 우리나라의 거의 정남쪽에 위치해 있던 일본이 《해동제국기》에서는 훨씬 더 동쪽으로 옮겨져 오늘날의 지도에 근접한 형태를 띠게 되는데, 이는 신숙주의 일본 사행 경험과 함께 조선조 초기 동북방 지역 개척에 따라 그곳 선원들을 통해 얻은 지리 지식이 쌓인 결과로 여겨진다. 그리고 백과사전에 소개되어있는 내용들을 정리해서 올립니다. ‘해동제국’이란 곧 일본의 본국·구주 및 대마도·이키도(壹岐島)와 유구국(琉球國)를 총칭하는 말이다. 찬술 당시의 내용은 해동제국총도(海東諸國總圖)·일본의 본국도(本國圖)·서해도구주도(西海道九州圖)·이키도도(壹岐島圖)·대마도도(對馬島圖)·류큐국도(琉球國圖) 등 6매의 지도와 일본국기(日本國紀)·유구국기(琉球國紀)·조빙응접기(朝聘應接紀) 등이었다. 이 책은 조선 초기와 일본 무로마치막부시대(室町幕府時代)의 한일외교 관계에 있어서 가장 정확하고도 근본적인 사료이다.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에도시대(江戶時代) 한일관계 연구의 유일한 사료로 폭넓게 이용되어왔다. 우리나라에서는 1933년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에서 ≪조선사료총간 朝鮮史料叢刊≫ 제2집으로 영인, 간행하였다. 그리고 1974년 민족문화추진회(民族文化推進會)에서 ≪해행총재≫를 간행하였다. 일찍부터 국가의 추기(樞機)에 참여한 인물이었다. 특히 그는 세조의 명령에 따라 영의정으로서 예조의 사무를 겸장, 사대교린(事大交隣)의 외교 정책을 전담하였다. 그리고 성종 즉위 이후 구규(舊規)를 정비하고 신제(新制)를 입안(立案), 해동제국 사인응접(使人應接)의 사례를 개정해 외교상의 면목을 일신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해동제국기≫는 그의 견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그 당시 일본에서 전래된 문헌과 왕년(往年)의 견문, 예조에서 관장한 기록 등을 참작해 교린 관계에 대한 후세의 궤범(軌範)을 만들기 위해 찬술한 것이다. 따라서 추록된 부분도 연산군대의 것을 제외하고는 그가 직접 첨가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 책은 한일 관계의 역사적 변천과 조빙응접(朝聘應接) 규정의 연혁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이 상당히 정비되어 있어 교린 관계의 선규(先規)로서 오랫동안 참고 되어왔다. 이 책은 조선 초기와 일본 무로마치막부시대(室町幕府時代)의 한일외교 관계에 있어서 가장 정확하고도 근본적인 사료이다.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에도시대(江戶時代) 한일관계 연구의 유일한 사료로 폭넓게 이용되어왔다. 우리나라에서는 1933년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에서 ≪조선사료총간 朝鮮史料叢刊≫ 제2집으로 영인, 간행하였다. 그리고 1974년 민족문화추진회(民族文化推進會)에서 ≪해행총재≫를 간행하였다. 영의정 신숙주가 졸하였으므로, 조회를 정지하고 조제와 예장을 예대로 하였다.…친히 일본에 건너가서 무릇 산천•관제•풍속•족계에 대하여 두루 알지 못하는 것이 없어서 ≪해동제국기≫를 지어 세종에게 올렸다. ; 領議政申叔舟卒 輟朝 弔祭禮葬如例…親涉日本 凡其山川官制風俗族系 靡不周知 作海東諸國紀 以進世宗 [성종실록 권제56, 10장 뒤쪽~12장 앞쪽, 성종 6년 6월 21일(무술)] 책의 제목은 '해동의 여러 나라에 대한 기록'이라는 뜻이지만, 그 범위는 대체로 일본과 유구국으로 한정되어 있다. 저자 신숙주는 세종 25년(1443년) 당시 27세의 나이로, 서장관으로서 통신사를 따라 일본을 방문했고, 일곱 달 동안 일본에 머무르며 대마도주와의 계해약조(癸亥約條)를 체결하였다. 그리고 사신으로 다녀온 지 28년만인 성종 2년(1471년) 겨울에 본서를 완성하였는데, 저자의 일본 사행 경험을 바탕으로 당시의 외교 관례 등을 정리하는 한편으로 완성된 뒤에도 일본과의 중요한 조약 체결 같은 외교적 내용이 추가되거나 잘못된 부분은 계속 보충되는 과정을 거쳤다. 이는 이 책이 개인 기행문의 성격을 넘어 외교 관례의 지침서 역할을 했음을 분명히 해주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서문에서 신숙주는 "그들의 습성은 강하고 사나우며, 무술에 정련하고 배타기에 익숙한데, 우리나라와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게 되었으니, 그들을 도리대로 잘 어루만져주면 예절을 차려 조빙(朝聘)하고 그렇지 않으면 갑자기 함부로 노략질한다. 듣건대 '이적(夷狄)을 대하는 방법은 외정(外征)이 아닌 내치에 있으며, 변어(邊禦)가 아닌 조정(朝廷)에 있으며, 전쟁이 아닌 기강 진작에 있다'고 하였는데 그 말을 이제 징험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고려 말기부터 조선 초기까지 연안을 휩쓸고 다니며 마구잡이로 약탈한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나타내면서 한편으로는 교린 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언제 발생할지도 모를 전란을 막기 위해서는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본서는 일본의 황실과 국왕(실제로는 무가 정권의 최고 권력자인 쇼군), 지명, 국정, 본국과의 교빙 및 왕래 연혁, 사신관에서의 대우와 접대에 대하여 기록하고, 「해동제국전도(海東諸國全圖)」, 「서해도구주도(西海道九州圖)」, 「일기도도(壹岐島圖)」, 「대마도도(對馬島圖)」, 「유구국도(琉球國圖)」, 「조선삼포도(朝鮮三浦圖)」등의 지도를 수록하였다. 본문 구성은 「일본국기(日本國記)」, 「유구국기(琉球國記)」, 「조빙응접기(朝聘應接記)」로 나뉘어 각각의 역사ㆍ지리ㆍ역대 지배자ㆍ언어 등을 수록하고, 또한 당시 조선을 방문하고 있던 일본의 지방 지배자(다이묘)들의 사절에 대한 대접 방법도 상세히 기록하여, 일본사 및 류큐 역사의 중요한 자료로 서뿐만 아니라, 일본어사에서도 빠뜨릴 수 없는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기록에 나온 풍속들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의 여러 풍속들과도 거의 일치한다. 천황의 아들은 그 친족과 혼인하고, 국왕의 아들은 여러 대신과 혼인한다. 여러 대신 이하의 관직은 세습하고, 그 직전(職田)과 봉호(封戶)는 정해진 제도가 있었는데, 세대가 오래 되매, 서로 겸병하여 증명할 수 없게 되었다. 형벌은 태(笞)ㆍ장(杖)은 없고, 가산을 적몰하기도 하고, 유배하기도 하며, 중한 것은 죽인다. 전부(田賦)는 토지 생산량의 3분의 1만 취할 뿐, 다른 요역(徭役)은 없다.【대개 공역(工役)이 있으면 모두 사람을 모집해 쓴다.】 무기(武器)는 창과 칼 쓰기를 좋아한다.【쇠를 불려 칼날을 만드는데 정교함이 비할 데 없다.】 활은 길이가 6~7척이 되는데, 나무의 결이 곧은 것을 취하며, 대[竹]로서 그 안팎에 대고 아교로 붙였다. 매년 1월 1일ㆍ3월 3일ㆍ5월 5일ㆍ6월 15일ㆍ7월 7일ㆍ7월 15일ㆍ8월 1일ㆍ9월 9일ㆍ10월 해(亥)일로써 명일(名日)을 삼는데, 명일에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향당(鄕黨)과 친족끼리 모여 잔치하고 술 마시는 것으로 낙을 삼으며, 물품을 서로 선사하기도 한다. 음식을 먹을 때는 칠기(漆器)를 사용하며, 높은 어른에게는 토기(土器)를 사용한다. 한 번 사용하면 즉시 버린다. 젓가락만 있고 숟가락은 없다. 남자는 머리털을 짤막하게 자르고 묶으며, 사람마다 단검(短劍)을 차고 다닌다. 부인은 눈썹을 뽑고 이마에 눈썹을 그렸으며, 등에 머리털을 드리우고 다리(가발)로써 이어, 그 길이가 땅까지 닿았다. 남녀가 얼굴을 꾸미는 자는 모두 그 이빨을 검게 물들였다. 서로 만나면 주저앉아서 예(禮)를 하고, 길에서 존장을 만나게 되면 신과 갓[笠]을 벗고 지나간다. 집들은 나무판자로 지붕을 덮었는데, 다만 천황과 국왕이 사는 곳과 사원(寺院)에는 기와를 사용하였다. 사람마다 차 마시기를 좋아하므로, 길가에 다점(茶店)을 두어 차를 팔게 되었으니, 길가는 사람이 돈 1문(文)을 주고 차 한 주발을 마신다. 사람 사는 곳마다 천 명, 백 명이 모이게 되면, 시장을 열고 가게를 둔다. 부자들은 의지할 데 없는 여자들을 데려다가 옷과 밥을 주고 얼굴을 꾸며서, 경성(傾城)이라 칭하고, 지나가는 손님을 끌어들여서 유숙시키고, 주식을 먹여 그 대가를 받는다. 그러므로 길 가는 사람은 양식을 준비하지 않는다. 남녀를 논할 것 없이 모두 그 국자(國字)【국자는 가다가나라고 부르는데 대개 47자임】를 익히며 오직 승려만이 경서를 읽고 한자를 안다. 남녀의 의복은 모두 아롱진 무늬로 물들이며, 푸른 바탕에 흰 무늬로 한다. 남자의 상의는 무릎까지 내려오고, 하의는 길어서 땅에 끌린다. 갓은 없고 혹 오모(烏帽)【대나무로 만들었는데 이마는 펀펀하고 앞뒤는 뾰족하여 겨우 상투를 가릴 만함】를 쓰는데, 천황ㆍ국왕 및 그 친족들이 쓰는 것은 입오모(立烏帽)【바르고 이마는 둥글고 뾰족함. 높이는 반자쯤 되는데 생초[綃]로 만듦】라 부른다. 삿갓[笠]은 부들과 대[竹] 또는 창목(椙木)으로 만든다. 남녀가 출행할 때 쓴다. '국속' 다음으로 이어지는 '도로리수' 항목에서는 당시 조선의 동래현 부산포에서 대마도, 미로관 등을 거쳐 일본의 수도에 이르는데 소요하는 거리는 물길로 323리, 육로로 18리(우리나라 리수로 계산하면 각각 3,230리와 육로 180리)라고 설명하고, 이어 일본의 8도 66주 및 기내(畿內) 5주에 관해 저자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내용들을 기록한다.(특히 이 부분에서는 일본의 주요 물산으로서 유황과 구리, 철에 관심을 보인 내용이 주목되는데, 이들 물산들은 당시 무기 제조에 꼭 필요한 자원이었다.) 보한재 할아버지께서는 서문에서 일본의 지리에 대해 "동해에 있는 나라가 하나만은 아니나 일본이 가장 오래되고 큰 나라라, 그 땅은 흑룡강의 북쪽에서 시작해 제주의 남쪽에 이르며, 유구국과 서로 접해 있고 그 세력이 심히 크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위치 비정은 이보다 앞선 태종 2년(1402년)에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 그려진 일본에 비해 훨씬 정확한 것이다. 《해동제국기》에 수록된 일본 지도는 우리나라에서 제작한 목판본 지도로서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지도이며, 바다에 조선식의 독특한 물결무늬가 그려진 것이 특징이다. 섬과 섬 사이의 상대적인 거리와 방위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 모양이나 위치비정에 있어서는 매우 높은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유구국(류큐)에 대해서는 그 특산물로 유황을 소개하면서 해상무역이 발달했다는 점, 남녀의 의복이 일본과 많이 닮아 있다는 점 등을 기록하고, "우리나라와 거리가 가장 멀어서 그 상세한 것을 규명할 수 없으니, 우선 조빙(朝聘) 및 명호(名號)의 차례만 적어서 나중의 고증을 기다린다."고 하여 후대의 자료를 참조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유구국기」 뒤에 이어지는 「조빙응접기」는 사행선의 숫자에 대한 규정 및 증명서 발급, 삼포에서의 연회와 급료, 삼포금약(三浦禁約)이나 조어금약(釣魚禁約) 등 조선과 일본 양국 간의 외교 관례를 규정하고 있으며, 조선 전기 대일 외교협정의 근거를 마련했다는 점에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또한 연회할 때 선원들에게 제공되던 음식의 내역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생활의 면모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해동제국기》는 완성 이후 조선의 대일 외교에 있어 중요한 준거가 되어 일본과의 외교 협상에서도 자주 활용되었으며, 실학자 이수광의 《지봉유설》, 18세기 이익의 《성호사설》, 안정복의 《동사강목》과 이덕무의 《청령국지》,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등에서는 모두 《해동제국기》의 기록을 인용하였다. 일본으로 파견되던 통신사들의 일본 기행문에는 일본의 학자들이 조선 통신사에게 《해동제국기》의 존재를 물었다는 기록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특히 일본의 풍속을 설명한 「일본국기」'국속(國俗)' 항목은 일본에서도 자료가 거의 없는 15세기 당시의 일본 풍속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16세기의 학자 김휴(金烋)는 저서 《해동문헌총록》에서 "사절이 왕래하는 절차 등 우리나라의 외교 규범에 있어서는 갖춰지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하여 그 의의를 높이 평가하였다.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해동제국기》에 대해 "요점이 잘 정리되어 있는 책"이라는 지적과 함께, 청의 학자 주이준의 말을 인용하여 "내가 늦게야 조선 사람 신숙주의 《해동제국기》를 보니, 비록 완벽한 책은 아니라 해도 일본 군장들의 수수와 개원에 있어 주에서 명에 이르기까지 구슬을 꿴 듯 두루 통하였다."고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 에도 시대의 학자 아라이 하쿠세키는 《해동제국기》에 주석을 달고 내용을 보충한 《해동제국기초석(海東諸國記抄釋)》을 지어 실무서로 활용하기도 했으며, 규슈왕조설(九州王朝說)을 주장했던 후루타 타케히코는 《해동제국기》에 실려 있는, 현재 일본의 현존하는 어떤 자료에서도 등장하지 않는 연호들을 근거로 꼽았다. 언어학자 스가노 히로노부(菅野裕信)는 이 책이 중세 일본어의 15∼16세기의 공백기를 보충해줄 중요한 자료이며, 류큐어에 대한 가장 오래된 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했다. 다만 일본의 소설가 시바 료타로는 《해동제국기》에 대해 "내용이 얕고 피상적"이라며 비판하였다. 다음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저자를 직접 만나볼 예정입니다. 본 서적에 관하여 좋은 의견이 있으시거나 관심 있으신 분 께서는 연락주시기를 바랍니다. 청주에서 석호 올림. 010-5290-1123
   
  0
3500
    N     분류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678 공공기관의 역사콘텐츠 제작이 처한 어려움 퍼온글 2012-01-01 5229
677 반주원씨 연락처 제보를 기다립니다. 신경식 2015-02-09 3139
676 고령신씨(高靈申氏)는 어떤 성씨일까? 신경식 2015-08-19 2208
675 녹두나물을 왜 숙주나물이라고 하는가? 신윤수 2015-03-04 2022
674 재계기간에대하여 신기수 2013-02-05 1810
673 보한재할아버지 : 조선통신사자료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 신석호 2016-02-05 1784
672 MBN 사장과 반주원씨를 '사자의 명예훼손'과 왜곡된 역사 날조자.. 신경식 2015-02-08 1549
671 청소년방에 항렬표를 올려 놓았습니다. -신씨 성 (6가지) 와 본.. 신규호 2012-02-20 1491
670 관세청의 숨은 일꾼 관세행정관 신승호 퍼온글 2014-08-09 1457
669 특별 대한민국 과 고령 신(申) 씨 가문 대한민국3.1 2019-05-12 1355
668 충북 보은군 보은읍 종곡리(鐘谷里) 마을 퍼온글 2014-08-16 1278
667 신숙주(申叔舟)와 성삼문(成三問) 퍼온글 2012-02-18 1251
666 영원군 절(靈原君 梲)공은 누구인가? 고천군파 2015-06-09 1250
665 KBS 진품명품에서 석북 신광수 선생이 지은 관.. 신경식 2015-01-24 1226
664 문경 이요정공묘소에 대한 진실과 왜곡 신윤수 2012-01-09 1220
663 경기동·강원지역 입향조 및 종회규약 신경식 2014-12-28 1208
662 항고장<전재> 신윤수 2012-04-02 1186
661 번역문 고천군파 2015-06-05 1176
660 '황금알' 뒤통수 치는 사람은 최측근, '배신시대' 격론 티브이데일리 2015-02-09 1157
659 "해동제국기" 일본 번역서 소개 신석호 2014-10-18 1140
658 고령신씨 가족만은 端宗遜位를 매개로 忠의잣대를 삼는 행위는.. 신윤수 2012-01-19 1140
657 김찰공(휘 제) 할아버님 묘표의 글은 문헌통고나 경인서울보에.. 신경식 2012-01-15 1139
656 동국대 정각원장 법타스님은 고령신문의 후예 퍼온글 2012-01-04 1120
655 아래있는 임이의 께임 안내 삭제와 조치에 대하여 신규호 2012-07-14 1116
654 '황금알' 반주원 고수, "배신은 역사서 뗄레야 뗄 수 없는 것.. 톱스타뉴스 2015-02-09 1078
653 신숙주는 숙주나물일 뿐인가 '왕도와 신도' 퍼온글 2012-01-02 1078
652 조선의 국민가수'이세춘A.. 퍼온글 2015-02-02 1012
651 2012 02 16 KBS측 변호사로부터 보내 온 준비서면 문충회 2012-02-18 1004
650 이 새 족보를 어느방천에 내놓을꼬....... 신윤수 2012-01-12 998
649 고령신문의 무지한 者들이 더 문제인 것 같습니다 신철우 2012-01-20 990
1234567891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