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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퍼온글
ㆍ작성일 2012-01-01 (일)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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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기관의 역사콘텐츠 제작이 처한 어려움
공공기관의 역사콘텐츠 제작이 처한 어려움


출처 : 2011년 12월 28일 (수) 06:42:00

한국고전번역원<forum@itkc.or.kr>

필자가 국사편찬위원회에 근무하게 되었을 때, 역사에 대해서 좀 안다고 자처하시는 주변 어른들로부터 자주 들었던 이야기는 이런 것이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史官같은 것이 되었다는 것이지? 임무가 막중하겠구만.”

  물론 오늘날 대한민국 정부조직에는 조선시대 사관과 같은 직책이 따로 없다. 보다 근본적인 차이는 “사초는 왕도 볼 수 없습니다.”라고 왕명을 받들지 못하겠다며 하급공무원이라 할 사관조차 배짱을 튕기던 조선시대와 달리, 오늘날에는 고위직, 하위직을 막론하고 그런 ‘간이 배밖에 나온’ 그런 공무원은 아예 찾아보기가 어렵다는 사실이다. ‘높으신 분의 말씀’이라고 하면 평생의 학자적 소신도 하룻밤 사이에 꺾고서는, 버선발로 달려가서 ‘왕명’을 목숨처럼 떠받들며 ‘곡학아세’하는 꼴을 자주 볼 수 있는 것이 오늘날의 관직사회이고 또 현실이다. 그렇기에 “사관은 무슨 얼어 죽을 사관요, 그냥 시키는 일이나 하고 각하의 국정운영과 여당의 통치철학에 어긋나는 글이나 말은 꿈에서도 조심하는 신세인걸요.”라고 대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역사적 지식을 저런 식으로 일상에 활용하고자 하는 욕구를 잘 알기에 그저 “네, 열심히 해야죠.”라고 넘기고 만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자신이 습득한 지식을 현실에 응용해보려 한다. 이것은 일종의 본능인데 이것이 인류의 문명과 과학을 발전시켜 온 원동력이기도 하다. 이 같은 본능은 물리학이나 생물학 뿐 아니라 역사학도 피해갈 수 없다. 특히 국민주권이라는 관념이 일반화된 이후, 다시 말해 국가가 일부 국가엘리트들의 것이 아닌 국민 모두의 소유라고 적어도 이론적으로 정립된 이후부터 역사는 모든 국민들의 ‘기본 교양’의 하나가 되었다. 앞선 ‘사관의 비유’처럼 모든 사람들은 ‘기본 교양’으로서 역사라는 ‘콘텐츠’를 소비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처지에 따라 활용(재생산)하기도 한다. 한데 모두가 역사학자로서의 훈련과 소양을 가진 것은 아니어서 이같은 ‘재생산’의 결과가 엉뚱한 오해와 논란을 초래하는 경우도 있다. 사극을 둘러싼 법정소송 해프닝도 그 중 하나이다.

 600백만불의 사나이를 흉내 내려고 담장 위에서 뛰어내리던 ‘추억 속의 사건’의 현대적 버전이라 할 만한 이런 해프닝이 며칠 전에도 일어났다.

드라마 ‘공주의 남자’를 상대로 신숙주의 후손들이 손해배상을 청구했다는 소식이 그것이다. 그 드라마를 보진 못했지만, 왜 소송을 제기했는지는 알 만하다. 드라마가 신숙주를 영웅시했다고 해서 후손들이 발끈할 리는 없으니까. 애당초 드라마 작가와 PD는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고 흥미를 유발하는 데에 소질이 있는 사람들이지,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사실대로 재연하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후자의 임무는 바로 역사학자들의 몫이다. 하지만 어쨌건 드라마가 역사를 소재로 하는 한 끊임없이 이 같은 송사와 시비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


  보통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로 인해 초래되는 다툼은 근현대사에서 더 잘 찾아볼 수 있다. 몇 년 전 KBS에서 방영되었던 ‘서울 1945’라는 드라마 역시 장택상과 이승만의 후손들로부터 비슷한 소송을 당했었다. 이 두 드라마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10.26을 다루었던 ‘그때 그 사람들’이라는 걸작 영화였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씨가 이 영화를 상대로 상영금지가처분신청 및 손해배상소송을 청구했던 것이다. 개봉직전의 이 소송으로 인해 영화는 앞뒤 몇 분 간의 다큐멘터리 장면을 뺀 채 상영해야만 했다.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면서 사실로 착각할 우려가 있다고 판결했던 당시 재판부는, 대한민국 성인('그때 그 사람들'의 등급은 미성년자 관람불가였다)들의 수준이 600만불의 사나이를 보고 2층 난간에서 뛰어내리던 아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혹은 재판부 자신의 수준이 그 정도였는지도 모르고. 내년 초부터 방영될 예정인 종편채널의 ‘박정희’라는 드라마에 대해서도 비슷한 논란이 재연될지도 모른다. 안 봐도 뻔하겠지만 박정희를 위대한 영웅으로 묘사하게 될 이 드라마를 둘러싸고 어떤 해프닝이 벌어질지 자못 궁금해진다.

  뭐 여기까지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이고, 이제 이 문제를 공공기관의 콘텐츠 제작과 관련하여 고민해보고자 한다. 고전과 관련된 칼럼을 청탁받아놓고는 이런 엉뚱한(?) 글을 쓰는 것은 필자가 바로 그런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몇 달 전부터 국사편찬위원회는 공영방송 한 곳과 함께 역사관련 짧은 다큐멘터리를 공동으로 기획하여 방영하고 있다. 이 작업은 몇 년 전부터 제기된 역사관련 콘텐츠 개발이라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정책방향과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별 어려움 없이 진행되고 있다. 공영방송과 역사전문 공공기관의 협력을 통해 도출될 수 있는 ‘역사콘텐츠’의 내용이란 짐작키 어렵지 않다. 아주 ‘모범적인’ 기획안들과 아이디어가 도출되었고, 그 중 몇몇은 이미 제작되어 전파를 타게 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이 외에도 전문가들을 위한 DB가 아닌 일반인들의 수요에 맞춘 대중콘텐츠를 추진 중이거나 추진할 계획을 갖고 있기도 하다. 한데 이렇게 기획·구축되고 있는 콘텐츠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비현대사 탈이데올로기’ 원칙이 그것이다. 물론 이것은 콘텐츠 제작과 관련한 내부의 원칙이거나 상부로부터 하달된 정책적 지침이거나 하지는 않다. 그저 대중콘텐츠를 구상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일종의 ‘공감대’ 혹은 암묵적인 합의였다. 역사전공자로 구성된 국사편찬위원회의 자문팀들이나 영상물제작의 전문가들인 공영방송의 제작진들 모두 이 점에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이 와중에 불행히도 현대사를 전공한 필자의 아이디어는 여러 번 ‘까임의 아픔’을 겪었다. 소재가 유별났던 것은 아니었다. ‘최고 권력자가 개입된 주가조작의혹 및 횡령사건’ 이라든지, ‘개인 통신물에 대한 국가의 검열과 정치적 악용 문제’, ‘사법부와 검찰 등 법집행기관의 정치적 활용과 편향성’과 같은 주제로, 지극히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사료를 기초로 과거의 사건들을 조명해보자는 것이었다. 구성의 허술함은 있었을지언정 ‘허구나 왜곡’의 우려는 없는 것들이었다. “사실에 기초하여, 잘 알려져 있지 않던 현대사의 주요 사건을 대중들이 읽기 쉬운 혹은 받아들이기 쉬운 형태로 가공하여 제공하는 것”, 이보다 더 역사콘텐츠 구축 사업의 본질을 잘 구현한 사례는 없을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했지만 그것은 완전한 오산이었다. 대체로 이 주제들이 공공기관이 제작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데에 다들 공감하는 듯 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필자 스스로도 이 주제들이 그다지 적합한 내용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특히 얼마 전 한 중학교 교사가 이승만과 관련한 시험문제를 출제한 것이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을 때에, 현대사와 관련된 콘텐츠 제작에 얼마나 많은 금기사항이 뒤따르는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그 중학교 교사의 시험문제가 무엇이었는지 궁금한 분들은 검색을 통해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재위 중에 있는 임금의 이름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되는 금기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전두환 정권 하에서 이주일씨를 비롯한 대머리 연예인들이 겪은 수난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대중연예인이 저러할진대 공공기관은 오죽할까? 그러니 역사관련 콘텐츠, 특히 현대사와 관련된 콘텐츠를 개발하는 데에는 극도의 조심스러움이 뒤따를 수밖에.

  시쳇말로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인 법이어서, 과거의 잘못을 따지다 보면 지금의 문제점까지 패키지로 걸고넘어지는 일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건국당시의 권력구조(대통령제)와 국제관계(한미동맹과 남북분단), 경제체제(시장자본주의)가 계속되는 한, 역사 속의 사건들이 현재의 이슈에 대입되는 일을 완전히 피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최고 권력자 혹은 그 주변의 부정이나 부패, 집회·시위와 같은 시민의 기본권에 대한 억압, 표현의 자유를 가로막는 검열 및 검열에 대한 공포심 유발, 대의민주주의와 절차적 민주주의의 원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날치기 입법, 부와 권력에 편향적인 재판의 부당성 등등의 문제는 우리 현대사에 빠지지 않는 핵심주제들이다. 문제는 이런 주제들을 자칫 잘못 다뤄 현직 대통령과 정부에 누를 끼치거나 정치적 중립을 깨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한국의 퇴임 대통령들이 부패스캔들로 궁지에 몰리는 것은 이제 거의 전통(tradition)이 되어 가고 있다"(버시바우 전 주한미대사)는 비판은, 고 노무현 대통령의 불행한 최후로 완전히 청산되었다. 국민 모두가 알듯이, 지금의 정부는 "돈 안 받는 선거를 통해 탄생한,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아닌가? 저 모든 현대사의 후진적 사건들은 과거지사일 뿐이다. 그래도 "그때 그 사람들"에 대한 필름삭제 명령을 내렸던 법원의 우려처럼, 혹시나 현대사의 사건들을 현실과 구분 못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우리는 여전히 몇 가지 '콘텐츠들'을 입에 담기 주저하고 있다. 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 이런 이야기들을 아주 자연스럽게 하게 되겠지만, 현재까지는 현대사와 관련된 콘텐츠 기획자들과 제작자들에게는 긴 겨울이 계속되고 있다.

 글쓴이 : 고지훈

  한국현대사 전공

현재 국사편찬위원회에 근무

저서

『현대사인물들의 재구성』

『1면으로 보는 한국현대사』등

논문

「건국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 엘리트와 민중」

「조선공산당의 대미인식」

「1962년 증권파동과 국가엘리트연합」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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