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신씨 가족만은 端宗遜位를 매개로 忠의잣대를 삼는 행위는 삼가 합시다
端宗遜位를 매개로 忠의잣대삼아 청빈하게 사셨던
선조님의 품격을 손상하지 맙시다.
12만 고령신씨 종친께 드리는 말씀VI
[고령신씨대동보]를 현미경검사를 해보니 잘못된 부분이 샘솟듯 자꾸만 쏟아져 나오니 어쩔 수없이 또 글을 띄웁니다. 派譜는 당사자들께서 열심히 검토하고 계시니까 접어 두겠습니다만 <맞지도 않는 年代를 조작하고 출처불명의 기록물을 근거하거나 비문을 曲解하면서 단종손위를 거론하며 不事二君의 충절을 잣대로 삼아 쓰여진 내용들>은 學德으로 이웃에 善行하며 孤高한 품위와 淸貧하게 사셨던 선조님의 품격을 자손들이 떨어뜨린 결과가 되면서 고령신씨 사대부가문에서만은“단종손위로 어쩌고 저쩌고..”하는 문구는 쓰지 말아야 합니다. 선대 때부터 문헌을 참조하여 小派간 중지를 모아 정리해 놓았어야 했습니다. 검토한번 없이 [상계편]에 올린 족.편위에 더 큰 책임을 물어야합니다. 주머니 채울 궁리만하여 쪽수 늘려 책 한권 더 만들려는 재 밥에만 정신을 팔다보니 衆口難防의 가치없는[大同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譜序, 實行錄, 碑文, 上系紹介文 등지에서 <端宗遜位란 단어와 함께 벼슬을 버린 내용>이 무려14句가 나오는데, 정은공, 감찰공, 귀래정공이 각 4句 순창공 2句 등입니다.
* 선조님의 역사와 행적을 옮기는데 부족한 부분이나 잘못 표기된 내용을 발견하셨으면 댓글을 달아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역사공부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본문 96쪽 ···不二의정신으로節義를 지킨歸來亭公과····(幷植) (귀)
100쪽···司諫院正言에제수되었으나端宗이遜位케되자不事二君의節義로서退官 하고·····(明休) (정)
103쪽·· 除授되어官職에계시다가西紀一四五五년端宗이遜位케되자 두임금의 臣下가되지않는節義로써····(達休) (정)
106쪽···景泰乙亥(西紀一四五五年端宗三年)에端宗의遜位로不事···(成求) (정)
143쪽···諱(휘)末舟(말주).단종(端宗)손위후에세상의영진(榮進)을····· (귀)
219쪽···景泰乙亥(西紀一四五五年端宗三年)에端宗이遜位케되자두임금의臣下가되지않는節義로서····(靜隱公諱枰墓表 湛書) (정)
222족···端宗遜位後에公이無意榮進하고解紱歸南原하야····(監察公諱梯墓表 奇正鎭述) (감)
227쪽···事行錄에이르기를公이智淳昌郡事에端宗遜位를당하여벼슬을버리고淳 昌에서光州瑞石山中으로····· (순)
309쪽···단종三년(一四五五년)을해에단종이선위(禪位)한후관직을버리고···세조가유신(儒臣)중에서장재(將材)를골라중용(重用)···문충공이훈공으로···벼슬에응하지않을경우···한해에세계단을승진하여사헌부(司憲府)집의(執義)···당상관····(姜希孟撰) (귀)
**313쪽의 한문 신도비명에는...乙亥以後解紱歸淳昌鄕築室屛居若終身····(姜希孟撰)으로 단종손위 단어가 전혀 없습니다.**
315쪽···景泰乙亥端宗遜位後에與家伯司成公으로托以頣養母親하고···· (감)
586쪽···단종손위로퇴거구례이종이라사남육녀···낙안공파규채(채우)지음 (감)
720쪽···事行錄에이르기를公이智淳昌郡事에端宗遜位를당하여벼슬을버리고淳昌에서光州瑞石山中으로····· (순)
726쪽···一四五五년端宗이遜位하자벼슬을버리고淳昌南山坮로下鄕하였다世祖 가公의將上之材라장차크게登用코자하였으나公이뜻이없어出仕하지않으니世祖가怒하여文忠公께<경의아우가끝내벼슬에응하지않을것인가?>하니府院君이대답하기를<臣弟가病이있어出仕를못하옵지어찌다른뜻이있겠습니까?>하시니世祖가怒氣를풀었다한다公께서五歲에父母님을여의고文忠公께서돌보아····· (귀)
729쪽···一四五五年(端宗三年)乙亥에端宗이遜位하자舍伯司成公과···(감)
가. 시대적 배경
저는 엔지니어 출신에 불과하지만 아는 척 좀하겠습니다. [단종손위] 당시에는 왕실, 특히 양녕대군, 효령대군 그리고 조정대신들이 한결같이 강력한 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단종이 禪位해야한다는 상소와 주청이 이어지면서 결국 1455년 윤6월 11일, 단종이 삼촌에게 양위하니 영의정 수양대군은 울면서까지“선위를 거두어 달라.”는 간(懇)도 받아들여지지 않음으로서 세조의시대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어보(옥새)를 전달한 신하는 사육신의 한 사람인 동부승지 성삼문이라는 사실만 으로도 당시에 강력한 왕권의 필요성이 공감대를 이루게 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상왕의 丈人 송현수, 금성대군, 권자신등이 수강궁(壽康宮; 창경궁)에 물러나 있는 상왕(단종)을 자주 찾아 복위역모를 꾀함으로서 피비린내 나는 옥사사건이 일어난 사실도 주지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나. 불사이군(不事二君)
흔히 약방의 감초처럼 쓰는 불사이군이란 단어를 자주 쓰고 위에 발췌한 내용에도 많이 인용되었는데 한 왕조에서 두 임금, 즉 단종과 세조를 함께 섬긴다고 불사이군이라고 단정 할 수 없습니다.
두문동(杜門洞)72현의 한 분으로서 평생동안 개성광덕산 부조현(不朝峴)에 계시면서 신생조선에 항거하셨던 우리의 5세조 순은공(醇隱公; 諱 德鄰)이 바로 고려의 충신이며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키신 불사이군의 표상입니다.
다. 단종손위 당시의 선조님의 생졸과 활동상황
1. 비문에 의하면 정은공(휘; 枰)은 1390년에 출생하시어 단종이 손위할 당시에는 66세 元老로서 退官 후 節義를 지키고자 상주로 낙향하셨다는 대목에 긍정 할 수 없고 비문을 쓰신 분은 16세기 漁城公(휘; 湛)이신데 국한문 혼용비문에 정확한 한글맞춤법이 의심됩니다.
또한 어성공께서 편찬하신 漁城譜에는 사위 세분만 기록되어 있는데 비문에는 8세 휘; 孟艇, 휘; 仲艇, 휘; 叔艇 세분과 따님 세분이 모두 기록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후대 자손이 어성공의 이름을 빌려 찬을 쓴 것으로 해석되며 이 비문을 발췌하여 序文을 쓰신 자손 성구공, 달휴공, 명휴공께서는 심사숙고 하셨어야 했습니다.
2. 감찰공(휘; 梯)께서는 1393년에 낳으시어 1443년 에 졸하시니 향년 51세이시며 단종손위 12년 전에 下世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드님 부사공(휘; 子杠)의 묘표와 [상계편]소개에, 그리고 손자 낙안공(휘; 礥) 추모문에도 부공에 대한 단종손위가 여지없이 표기되어있습니다. 찬을쓰신 後代子孫 견록공, 규채(채우)공께서는 신중하셨어야 합니다.
3. 순창공(휘; 仲舟)께서는 문충공 보한재 할아버님의 仲兄으로서 1417년보다 거의 7-10년 앞서 1400여 初.中頃에 낳으시어 1447년(세종 29년)에 下世(40~45歲쯤?)하신 것으로 광주 순창공 묘비에서 확인되었습니다. 사행록이 얼마나 품격을 가춘 책자인지는 모르지만 순창공 할아버님의 高潔하신 품위에 반한 기록은 신중하셨으면 합니다.
4. 귀래정공(휘; 말주)께서는 1429년에 낳으시어 1433년 5세에 부모님을 모두여의고 13년 年上의 셋째형님 문충공 보한재의 훈도를 받고 크시어 1454년 11월 문과식년시 정과에 33인중에 합격하셨는데, 이때 단종은 보한재(휘; 숙주)에게 아우의 급제를 축하하는 연회를 베풀도록 궁온(술)30병을 하사한 기록이 있으며,
姜希孟撰神道碑銘에의하면····景泰辛未司馬登甲戌親試及第授從仕郞承文院正字累遷奉訓郞司諫院右獻納知製敎乙亥以後解紱歸淳昌鄕築室屛居若將終身天順己卯世廟錄儒臣堪爲將者縉紳士大夫····로 기록되었고,
1470년 순창에 잠시 머무르셨다가 1476년 전주부윤을 시작으로 창원도호부사, 1487년 대사간및 첨지중추부사, 전라수군절도사등을 역임하신 것으로 왕조실록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후손에 의해 쓰여진 刊行序나 神道碑銘 解釋文, 상계편 등에 단종손위로 인한 충절을 억지로 집어넣고 말았습니다. 특히 726쪽 문장을 보면 마치 코미디 대본을 읽는 것 같이 유치하기 그지없습니다.
라. 고령신씨 가족만은 端宗遜位를 매개로 忠의잣대를 삼는 행위는 삼가 합시다.
우리 문충공 할아버님은 위대한 행적을 남기신 고령신씨 큰 어른이십니다. 거룩한 발자취가 무참히 왜곡된 것은 <연려실기술>이 인용한 <송화잡기>에서 사육신의 한사람인 이개의 후손 이기(李墍)가 지은 시화만록집 <송화잡설>을 말합니다. <패림>이나<<대동야승>등에 수록되어있는 여러 잡설인데 이개의 후손으로서 우리 문충공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갖고 풍문으로 전해오는 내용들을 창작을 가미하여 여과 없이 쓴 <이야기책>입니다.
근세에 들어와 이광수, 박종화에 의해 일제식민사관을 더 가미하여 왜곡에 왜곡을 더하여 쓴 것이 정설이양 전해져 오기도 했습니다.
얼마 전 공영방송 KBS에서는 [공주의 남자]란 연속극으로 우리 문충공 할아버님과 둘째아드님 북백공 할아버님을 심하게 왜곡하여 방영함으로서 우리고령신씨 모든 자손은 분노하고 [문충공종약회]에서는 법에 호소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우리는 [端宗遜位를 매개로 忠의잣대를 삼는 행위]는 삼가 합시다. 스스로 제 얼굴에 침 뱉기나 다름없습니다.
어차피 [고령신씨대동보]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렸습니다. 지금부터 전자족보로 대치할 계획을 세우며 모든 종친의 중지를 모아 차근차근 연구, 검토, 준비하는 마음의 자세로 자손의 사명을 다집시다.
-文景 二樂亭公 17대손 允秀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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