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방
ㆍ작성자 서정
ㆍ작성일 2017-02-02 (목)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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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중기의 명신(名臣)신용개(申用漑)이야기

삼괴당(三魁堂)신종호(申從濩1456-1497)큰아버지 봉례공(奉禮公 ; )의 셋째아들이며 이요정의 사촌형으로서 는 차소(次韶), 호는 삼괴당(三魁堂)이다.

  1474(성종5) 약관에 성균 진사시에서 장원을 하고, 1480(성종11) 식년문과에 또다시 장원하여 그 해 감찰에 임명되었고 사가독서 하였다. 이듬해 천추사(千秋使) 홍귀달(洪貴達)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갔다. 그 때 명나라 역관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수료병(水潦病)에 걸려서 돌아오지 못하고 고생하는 자가 많았으므로 명나라 예부(禮部)에 건의하여 그들을 치료하게 한 뒤, 모두 귀환하게 하였다.

  1486(성종17) 부응교로 있을 때 또다시 문과중시에 장원하여 과거제도가 생긴 이후 세 번이나 장원을 한 것은 신종호가 처음이라며 칭송이 자자하였다. 그 해에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이 되었고 [여지승람(輿地勝覽)]을 정정하여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으로 다시 찬술하는 데 참여하였다.

  1487[여지승람]을 지은()공으로 녹피(鹿皮)를 하사받았고 왕명으로 요동(遼東)에 가서 한어를 습득하고 돌아왔다. 1488년 홍문관직제학을 거쳐 부제학이 되었으며, 이듬해 동부승지가 된 뒤 예조참의. 좌승지. 우승지. 도승지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491(성종22)대사헌으로 있을 때 어전회의 중에 북쪽 오랑캐 침입 사건에 대한 영의정을 모욕한 죄로 파면되었으나, 얼마 뒤 다시 등용되어 도승지.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병조. 예조. 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494(성종25) 경기도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중앙으로 들어와 예조참판 겸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로 있으면서 [성종실록(成宗實錄)]편찬에 참여하였다.

  1496(연산군2) 병환을 무릅쓰고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오던 도중 개성(開城)에서 졸()하였다. 문장. . 글씨가 뛰어났다. 저서로 [삼괴당집(三魁堂集)]이 있다.

 

기재(企齋)신광한(申光漢1484-1555)은 이요정의 사촌동생이다. 내자시정(內資寺正)을 지낸 여섯째 작은아버지()의 아들로서 는 한지(漢之), 시회(時晦)이며, 호는 기재(企齋), 낙봉(駱峰), 석선재(石仙齋),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1507(중종2) 사마시에 합격하고, 1510년에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의 특혜를 받았다. 1513(중종8) 승문원박사(承文院博士)에 등용되고, 이어서 홍문관부수찬·교리·정언(正言공조정랑을 역임하고,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으로 경연의 시강관(侍講官)을 겸임하였다. 이 때 중종이 학문을 장려하며 유학자를 우대하고 주야로 경연을 열어 학자들과 학문을 논하였다.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 고금의 시무(時務)를 논하여 채택되는 바가 매우 많았으며,  1518(중종13) 특명으로 대사성(大司成)에 올랐다. 이듬해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 일파라고 탄핵을 받아 삼척부사로 좌천되고, 이듬해에 파직되었다가 다시 여주로 추방당하여 18년 동안 칩거하였다.

  1537(중종32) 다시 등용되어 이조판서. 홍문관제학을 지냈으며 그 이듬해 윤인경(尹仁鏡)이 이조판서가 되어 기묘사화에서 화를 입은 사람들을 서용(恕容)하자 대사성에 복직되었다. 다시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경기도관찰사.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병조참판을 역임하고 1540년 대사헌(大司憲)이 되어 관리들의 기강을 엄히 다스렸다.

  1545(명종즉위년) 을사사화 때 윤임(尹任)등 대윤(大尹)을 제거하는 데 공을 세워 추성위사홍제보익공신(推誠衛社弘濟保翼功臣)3등에 책록되었고 같은 해 우찬성(右贊成)으로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대제학.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경연동지사(經筵同知事). 춘추관동지사(春秋館同知事)를 겸임하였다. 이어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라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으며 1550(명종5) 좌찬성(左贊成)이 되었다.

  1553(명종8) 기로소(耆老所; 연로한 문신들을 친목 및 예우를 위해 설치한 명예기구)에 들어가 궤장(几杖;의자와 지팡이)을 하사받았다.

  筆力이 뛰어나 몇 편의 몽유록(夢遊錄)과 전()을 남겼는데 몇 편을 간단히 소개해본다.

[안빙몽유록(安憑夢遊錄)]. [서재야회록(書齋夜會錄)]은 이른 시기에 이루어진 夢遊錄이다. [안빙몽유록] 내용을 보면, 급제하지 못한 안빙이라는 사람이 꽃동산에서 잠들었다가 꽃 나라에 가서 놀고 시를 읊었다는 내용이고 [서재야회록]은 어느 선비가 못 쓰게 된 벼루. . . 종이가 버림받게 되었다고 서러워하는 것을 엿듣고 정중하게 땅에 묻은 뒤 제사지냈다는 내용이다. [최생우진기(崔生遇眞記)]는 최생이 선계(先界)에서 놀고 용궁(龍宮)에서 시를 짓다 돌아와 산에서 약초를 캐다가 생애를 어떻게 마쳤는지 알 수 없다고 한 내용으로 김시습의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과 비슷하다. [하생기우록(何生奇遇錄)]은 과거공부를 하던 하생이 죽은 여자와 사랑하고 그 여자가 다시 살아나 부부가 되었다는 내용으로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와 비슷하다. 이들은 1553(명종 10) 목판본으로 간행된 [기재기이(企齋記異)]에 실려 전하여지고 있다. [이요정행장(行狀)][이요정집(二樂亭集)]의 발문(跋文)을 적었다.

 

성중암(成重淹1471-1501) 는 계문(季文), 는 청호(晴湖)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좌찬성 성억(成抑)6代孫이며 어려서부터 시문에 뛰어나 생원, 진사를 거쳐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했다. 그 당시 하루에 30편의 시를 짓자 김일손. 조위가 그의 작품을 보고 놀라고 감탄하였다. 1494(성종25)에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연산군 때 검열(檢閱), 정자(正字) 등의 벼슬을 거쳐 박사(博士)가 되고 경연(經筵), 춘추관(春秋館)의 기주관(記事官)을 겸하였다. 무오사화가 일어날 당시의 명현(名賢)들이 화를 입자 부당함을 주장하다가 하동부(河東府)로 귀양 간 뒤 강릉으로 옮겨진 후 사사(賜死)되었다.

 

남곤(南袞 ? - 1471) 는 사필(士華)이고 는 지정(止亭)또는 지족당(知足堂)이다. 본관은 의령(宜寧)이며, 김종직의 문하에서 문명을 떨쳤다. 갑자사화 때에 서수(西陲)로 귀양 갔다가, 중종 때 영의정(領議政)까지 올랐으며 이요정의 뒤를 이어 문형(文衡)이 되기도 했으나, 젊어서부터 출세하기위한 비행(非行)이 적지 않으므로 겉과 속이 다른 인물로 인식되어 주변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최숙생(崔淑生1457-1520)은 이요정보다 6살 연장이다. 1496(연산군 2)에 이요정과 사가독서를 하였다. 갑자사화 때 신계(新溪)로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 때 풀려났지만 기묘사화 때 다시 파직되고 그 다음 해에 세상을 떴다.

 

홍언충(洪彦忠1473-1508)는 직경(直卿)이고, 악계인(岳溪人)으로 홍귀달의 아들이다. 이요정과 함께 사가독서 하였으며 갑자사화로 진안(眞安)에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으로 조정에서 다시 불렀으나 끝내 응하지 않고 시와 술로 여생을 즐겼으며 문장(文章)이 뛰어나고 예서를 잘 썼다. 인륜과 군신(君臣)간의 의리를 고집하여 연산군을 위해 절개를 지킨 유일한 사람이다.

 

정희량(鄭希良1469- ? )은 해주인 으로 는 순부(淳夫)이다. 이요정보다 6살 아래이며 1496년에 賜暇讀書 같이하였다. 1469(성종1)에 태어나 1495(연산군1)에 문과에 올랐으며, 김종직의 문인으로 무오사화 때 의주에 유배되었다가, 3년 후에 경상도 김해로 이배(移配)되었다. 갑자년에 천재(天災)로 인해 죄수를 놓아줄 때에 풀려났다. 평소 음양학(陰陽學)에 밝아 갑자년운수(甲子年運數)를 보고 말하기를갑자년의 화()는 무오년보다 더욱 클 것이다.”라고 예언하고 그해 5월에 잠적해 버렸다. 그때 나이가 34세로 어디서 죽었는지 알 수 없다. 후에 그가 감추어 두었던 사초(史草)[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를 편찬할 때 많은 도움이 되었는데 박은. 이행. 홍언충과 더불어 당시 문장사걸(文章四傑)로 불리웠다.

 

  이요정과 교류한 신진사류들 대부분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그의 학문적 영향 아래 있었고 그들과의 교유를 통해 자연스럽게 金宗直의 학문에 영향을 받게 되었으며 그의 학문은 조선 초기 길재(吉再)의 절의나 단종조(端宗朝)의 삼상육신(三相六臣)과 같은 충절에 일정한 관계를 가지며실천위주 성리학(實踐爲主 性理學)’기풍을 계승하였는데, 당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양상으로 표출되었다.

 

첫째, 조선초기에는 숭유억불(崇儒抑佛)을 기본으로 하였으나, 불교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불교와 음사적(淫祀的)인 상제의식(喪祭儀式)가례<家禮>대로 실행하여 성리학적인 실천윤리를 보급시키는데 힘썼으며,

둘째, 통경명사(通經明史)와 사장중심(詞章中心)위인지학(爲人之學)에 대하여 수양성찰(修養省察)을 중시하는위기지학(爲己之學’)을 숭상하는 양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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