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방
ㆍ작성자 서정
ㆍ작성일 2017-01-09 (월)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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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중기의 명신(名臣)신용개(申用漑)이야기

. 조광조의 개혁정치(改革政治) 실현(實現)의 꿈

 

 

1. 34세 늦은 나이에 종6품 벼슬에 오르다.

 

  고려 말, 조선 초기에 이르러 신흥사대부(新興士大夫)라는 정치세력이 새롭게 등장하였다. 이들은 당시 부패한 지배층인 권문세족(權門勢族)을 물리치고 여러 개혁조치(改革措置)를 취했다. 그런데 얼마 후 신흥사대부들은 새로운 나라의 건국을 주장하는 급진파(急進派)와 고려의 점진적 개혁(漸進的改革)을 주장하는 온건파(穩健派)로 나누어지게 되는데, 결국 급진파가 온건파를 누르면서 1392년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면서 핵심 관료층이 되었다. 그러나 권력과 막대한 부()를 한 손에 쥐게 된 이들은 곧 전에 자신들이 그토록 비판했던 고려의 지배세력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타락해 갔고 이에 15세기 말, 16세기 초에사림(士林)’이라 불리는 새로운 정치 세력이 나타나 부패한 기득권 세력, 훈구세력(勳舊勢力)’과 대립하며 개혁을 시도(試圖)하였는데 이때 사림파를 이끌며 개혁을 주도(主導)한 사람이 바로 조광조이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개혁정치의 선구자 조광조(趙光祖14821519)는 부패한 기득권세력을 물리치고 자신이 주도한 새로운 사회를 만들려다 좌절되면서 죽음을 당해야했다. 그의 죽은 후 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극명하게 달리 평가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흔히 광인(狂人)또는 화태(禍胎)라고 불렀는가하면, 조광조는 우리나라 성리학(性理學)을 모태(母胎)로 한 도학정치(道學政治)를 실현하고자했던 뛰어난 학자이며 정치가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즉 개혁정치(改革政治)에는 실패했을지라도 학문적(學問的)인면에서는 극히 존경받을 만한 인물인 것이다.

  조광조는 17세 때, 28세 손위 김굉필(金宏弼14541504)을 처음 만나본격적인 성리학(性理學)을 공부하였다. 김굉필은 조선성리학의 거두(巨頭)라고 하는 김종직(金宗直14311492)의 수제자(首弟子)이다. 김굉필의 제자가 되어 성리학을 공부한 조광조는 얼마 후 소과(小科; 과거 시험의 하나, 생원과 진사를 뽑던 시험으로 여기 합격하면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얻음.)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입학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성리학(性理學)이란, 남송(南宋)시대 주자(朱子)에 의해 집대성된 유학(儒學)의 하나로, 주자학(朱子學)이라고도 불리는데, (). (). (). (). (). ()의 상호관계相互關係를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특히 정치적(政治的)이거나 도덕적(道德的)으로 임금과 신하의 의()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던 중 천거제(薦擧制)가 확대되면서 학생천거제(學生薦擧制)가 추가로 마련되었는데, 이 때 함께 공부하던 성균관 유생들이 조광조를 적극 천거하여 그는 1515(중종10) 34세에 종6품의 벼슬에 올랐다. 그러나 조광조는 천거로서는 중요한 관직에 올라갈 수 없었기 때문에 같은 해 다시 대과시험(大科試驗; 소과에 합격하여 생원. 진사가 된 사람에게만 시험자격이 주어지며 여기 합격하여야 문관이 될 수 있음)에 당당히 합격하여 곧바로 사간원(司諫院) 언관(言官)직에 임명되었다. 신진관료로서 패기와 재능을 갖추고 있던 조광조는 中宗의 눈에 들어 상당히 빠른 속도로 승진을 거듭하여 벼슬길에 나선 지 3년 만에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의 지위에 오르게 됨으로서 자신이 평소 꿈꾸어 온 자신의 개혁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2. 勳舊士林의 형성(形成)

  조광조가 활동할 당시에는 훈구(勳舊)와 사림(士林)과의 대립이 극에 다다른 때였다. 즉 정계에 새롭게 떠오른 사림세력과 이미 여러 대에 걸쳐 조선 사회의 부와 권력을 독점해 온 훈구세력간의 뿌리부터 살펴보고 갈등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도 알아볼 필요가 있다.

***훈구와 사림; 이 두 세력은 모두 고려 말 신흥사대부(新興士大夫)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고려사회(高麗社會) 전반에 걸친 개혁을 부르짖었던 신흥사대부(新興士大夫)들은 점차 고려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점진적인 개혁을 해야 한다는 온건파사대부(穩健派士大夫)들과 새로운 나라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 급진파사대부(急進派士大夫)로 나누어졌다. 결국 급진파가 온건파를 누르고 세력을 장악하면서 조선이 세워졌다.

  정도전(鄭道傳). 권근(權近) 같이 조선의 건국과정(建國過程)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급진파사대부(急進派士大夫)들은 건국 후 핵심 관료층이 되었고 이들을 훈구세력(勳舊勢力)이라 불렀다. 반면 길재(吉再13531419)같이 건국에 참여하지 않은 온건파사대부(穩健派士大夫)들은 향촌사회(鄕村社會)에 은거하면서 학문연구와 제자양성에 전념했다. 이들을 사림세력(士林勢力)이라고 불렀다

  조선건국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핵심관료층 공신(公臣)들은 과전(科田)을 지급받아 부를 누렸다. 또 여러 차례 정치적인 격변(激變)을 거치면서 왕을 도운 사람들이 공신이 되어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하사받기도 하였다. 그 중에는 공신이 다시 다른 명칭의 공신으로 책봉된 경우도 꽤 많았다. 이렇게 공신목록에 오른 사람들 중에는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으면서 권력기반을 더욱 확고히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일단 공신에 책봉(冊封) 되면 대를 이어 부()와 권력(權力)을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있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공신책봉에 신중을 기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세조(世祖14551468)때 이르러 상황은 달라졌다.

  나이 어린 조카 단종(端宗14521455)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도덕적으로 명분이 서지 않는 짓이라는 생각을 항상 하고는 자신을 도와준 사람들에게 일종의 대가를 약속한 것이 바로 공신책봉(功臣冊封)이었다. 이때 공신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무분별한 공신책봉은 계속 이어졌으니, 종종 대에서도 새롭게 책봉된 공신들은 中宗反正을 통해 공신이 된 경우인데 이들이 하나의 정치세력을 이룬 세력들을 훈구 또는 훈척(勳戚)이라고 불렀다.

  한편 사림(士林)세력은 지방의 중소지주출신(中小地主出身)으로, 성리학적(性理學的)소양을 갖추고 향촌사회(鄕村社會)를 이끈 지방 사대부들을 말하며 그들은 스스로를士大夫라 부르기보다士林이라 불러 훈구파와의 차별성을 강조하였다. 훈구와 사림은 처음부터 추구하는 學文의 방향도 달랐다. 조선의 관료가 된 급진파들은 학문을 할 때도 나라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실용적인 면을 강조했는데, 사장(詞章), 시가(詩歌)와 문장을 중시하게 되고 이는 곧 문서작성이나 각종 편찬사업 그리고 외교문서의 작성에 필요한 능력(能力)을 보는 것이었다. 반면 지방에 은거(隱居)한 은건파 사대부(穩健派士大夫)들은 성리학의 이론적(理論的)이고 철학적(哲學的)인 면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경학(經學; 사서삼경 같은 유교경전의 뜻을 깊이 연구하는 학문)을 강조하였으며 인간의 도리(道理)나 도덕적 규범(道德的規範)을 중시하였다.

 

   

3. 훈구파의 經濟獨占과 사림파의 政界進出

  훈구와 사림, 두 세력은 조선건국이후 다른 세계에 사는 것처럼 보였으나15세기 말엽부터 두 세력은 심각하게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훈구파의 지나친 경제독점(經濟獨占)이 사림파를 자극했던 것이다. 14세기 이후로 시작된 농업기술의 발달로 생산력이 높아지고, 그로인하여 국가경제 전반에 동반성장(同伴成長)을 가져왔다. 먹고 남는 곡식이 생기면서 이를 팔기 위한 장시(場市)가 발달하였고 상업유통(商業流通)의 발달은 곧 경제전반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그러자 15세기 말 훈구파들은 당시의 경제적 변화에 누구보다 민감하게 대응하면서 권력을 이용한 치부(致富)를 하게 되는데,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땅을 개간하거나 백성들이 갖고 있던 토지를 빼앗는 것은 흔한 일인데 이들 중에는 거지가 되어 떠돌이 신세가 되거나 산에 들어가 도적의 무리가 되는 사람이 상당수 있었다.

  한편 향촌(鄕村)의 중소지주(中小地主)였던 사람들에게는 향촌사회와 농민들이 황폐해지는 것은 곧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기반이 흔들리는 것이라 생각하고 자신들의 기반을 보호하기 위하여 成宗대부터 중앙정계(中央政界)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일찍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성리학적 윤리를 내세워 조선건국에 참여하지 않은 온건파 사대부의 뒤를 이은 사람들이었다. 같은 이유로는 세조의 왕위 찬탈에 참여하지 않아 훈구세력에 비해 도덕적인 면에서 떳떳한 편이었고 이런 배경에서 이 사람들은 훈구세력의 부패상을 강하게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동시에 사림들은 사창제(社倉制; 농민들이 관()에서 곡식을 꾼 후 이자를 갚지 못해 노비로 전락하는 것을 막고자 가난한 농민들에게 싼 이자로 곡식을 꾸어 주는 제도)실시나 유향소(留鄕所; 조선 초기에 악질향리를 규찰하고 향풍을 바로잡기 위해 지방의 품관들이 조직한 자치기구)복립운동(復立運動)등을 통하여 향촌에서 세력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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