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령신씨는 고려중엽 문과에 급제하여 검교군기감을 역임하신성용(成用)을 시조로 모시고 있으며, 고려중엽과 조선조에 명성을얻어 종세가 번창해 오늘에 이른 우리나라에서도 몇 안되는 명가의 전통을 갖고 있는 씨족입니다.

2세는 정순대부 좌우위 상호군 휘 강승(康升)이시고, 3세는 광정대부 첨의평리 상호군 휘 인재(仁材)와 시중 휘 인기(仁杞)이시며, 4세는 중현대부 감문위 대호군 휘 사경(思敬)이십니다.

4세조까지의 종세는 명확하게 기록된 것이 없고, 족보에서도 단손으로(3세에는 형제분) 이어져 와 크게 번창하였다고 생각되어지지는 않습니다.

5세조 순은공 휘 덕린(德隣)은 고려조에서 간의봉익대부 예의판서 겸 보문각 제학이시며, 그 덕과 학문이 높아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 도은 이숭인, 교은 정이오 등과 육은(六隱)으로 추앙받으셨고, 그 아드님이신 호촌공 휘 포시(包翅)와 함께 고려가 멸망하였을 때 조선조에 항거하여 두문동에 들어가 저항한 72현(賢)으로 숭앙받고 계신 분이시며, 우리 고령신씨의 번영은 이 어른때부터 그 기반이 다져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6세조 호촌공 휘 포시(包翅)는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고려가 곧 멸망하였으므로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아버님이신 순은공과 함께 두문동에 들어가 항거하였다가 세종조에 이르러서야 공조참의를 지내신 분입니다.

7세조에는 첫째분이 공조좌참판 및 집현전 제학이신 암헌공 휘 장(檣)이시고, 둘째분이 사간원 정언을 지내신 정은공 휘 평(枰)이시며, 셋째분이 사헌부 감찰을 역임하신 감찰공 휘 제(梯)이십니다.

현재의 우리 고령신씨는 대부분 위 세분의 자손들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각파를 논할때는 삼대파로서 암헌공파, 정은공파, 감찰공파로 분류되는 것입니다. 3세조때 둘째 아들이신 시중공 휘 인기(仁杞)의 자손이 7세조에 4분(실, 근, 황, 남) 계시었으나, 그 자손이 크게 번창하지 못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므로 삼대파외의 시중공파로서 분류되어 있습니다.

 

현재 우리 고령신씨의 인구수는 정확한 통계가 없어 가늠하기 어렵지만, 1985년 경제기획원 통계국 자료에 의하면 약 12만명으로 되어 있으나, 조사에 누락된 사람이 많고 또 지금은 오랜 세월이 지나 더 많은 종친이 늘어났으므로 이 숫자 또한 믿을 수 없는 부분이 많아 우리는 통칭 20만 종친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대종약회가 탄생한 것은 근래의 일입니다.

그 옛날 우리의 족보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1578년(선조 11년)암헌공의 둘째 아들이신 순창공의 5대손 충청관찰사 휘 담(湛)의 어성보(漁城譜)인데 시조로부터 근 400년이 지난 후의 일이고, 구한말까지 3회의 족보 간행이 더 있었으나 각 지역에 모여사는 일가들끼리는 그 지역만의 화수회(花樹會)를 만들어 모든 일을 서로 상의하고 결정해 왔지만, 종친수가 크게 늘어나고 전국규모의 종친관을 갖게 되며, 교통이 발달하여 전국을 1~2일 생활권으로 하게 되니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종친간에 대종사를 논의할 수 있는 협의체가 필요한 것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대종약회의 탄생을 어느 회합으로 기점을 삼을 것인가에 대해 약간의 논란은 있어왔습니다.

대종약회에 보관되어 있는 기록(중호 전부이사장의 선고이신 존식(存植)씨가 보관하고 계시던 기록책을 대종약회에 기증한 서류)을 확인해 본 결과, 1937년 11월 24일 충북 청원군 가덕면 한계리 원동 백족산 제실에서 전국 각 파 대표 종친이 모여 만대산의 사방공사와 옥과문각 및 제실건축 등을 논의하면서 전국적인 종친회의 필요성을 느껴 회장에 백우(伯雨)씨, 총무에 존식(存植)씨를 선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고, 또한 2차 회의는 1942년 12월 7일 대전시 용두동 석휴(錫休)씨(관우 전부회장의 선고) 집에서 모임을 갖고 만대산 제실중수 등을 의결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3차 회의는 1945년 10월 30일 대전시 인동 구식(龜植)씨 집에서 모임을 갖고 만대산 제실중수와 대동보 편찬 등을 결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대종약회에서는 1970년 12월 3일 제 7차 총회를 마친 뒤 발간된 「고령신씨 대종약회 약사」에서 1955년(이는 단기를 서기로 환산할 때 1954년을 잘못 기산한 것으로 생각되어 앞으로는 1954년으로 변경함) 대전 구식(龜植)씨 집에서 모임을 갖고 회장에 백우(伯雨)씨를 선임한 것을 제 1차 회의로 하였으며, 이를 기점으로 지금까지의 총회 차수를 계산해 왔습니다.